[칼럼] 방송의 날 '애가(哀歌)'... "방송이 살아야 한류가 산다"
배기형 | 한국방송공사(KBS) 프로듀서
9월 3일은 방송의 날이다.
필자는 1991년에 방송사에 PD로 입사하여 지금까지 일하고 있으니 어느덧 서른 네번이나 ‘방송장이’로서 방송의 날을 맞이하고 있다. 시간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어서 때로는 한 컷의 영상처럼 순식간에 지나가고, 때로는 긴 다큐멘터리처럼 깊고 길게 느껴지기도 한다.
첫 방송을 만들던 날, 떨리는 손으로 방송 테이프를 주조정실에 넘기던 그 순간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때의 열정과 두려움, 그리고 설렘이 지금도 가슴 한 켠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의 방송을 둘러싼 엄중한 상황은 개인의 소회를 돌이켜 보는 것조차 사치스럽게 느껴지게 한다. 왜냐하면 지금 우리나라의 방송은 실로 급박한 위기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는 지인의 물음에 ‘공사다망’하고 있다고 답한다. ‘公私多忙’을 ‘公社 다 망하는’으로 갈음하는 ‘아재’ 말장난이자 씁쓸하고 자조적인 언사(言辭)다.
시청자 이탈
우리나라에서 방송의 붕괴는 단순한 과장이 아닌, 여러 지표와 현상이 보여주는 냉혹한 현실이다. 무엇보다 가장 우려되는 것은 ‘시청자가 떠났다’는 것이다. 시청률의 급격한 하락은 이미 전혀 새로운 일이 아니다. 옛날 40%를 웃돌던 드라마의 시청률이 한 자릿수의 시청률이 된게 불과 수년 전 같은데, 이제는 1% 이하 수준으로 수렴하는 일이 빈번해졌다. 특히 젊은 세대의 TV 이탈 현상은 심각한 수준이다. 많은 젠지(Generation Z) 세대에게 TV는 이제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장치가 되어버렸다.
위기의 근본 요인은 미디어 소비 행태 변화와 콘텐츠에 대한 기대 수준 변화일 것이다.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전통적인 TV 시청에서 벗어나 모바일과 OTT 플랫폼을 통한 콘텐츠 소비가 늘어났고, 글로벌 콘텐츠에 대한 접근성이 높아지면서 콘텐츠의 질적 향상에 대한 요구도 커졌다. 넷플릭스보다 재미없는데 같은 시간을 들여 방송을 보라고 강제할 수는 없다.
시청자의 이탈은 필연적으로 방송사의 돈줄을 마르게 했다. 광고 시장 파이의 축소와 미디어 환경 변화에 따른 수익 구조의 악화는 예견된 수순이었다. 디지털 플랫폼으로의 광고 이동, OTT 서비스의 성장에 따른 경쟁 심화, 콘텐츠 제작비 상승 등이 방송사들의 재정을 압박하고 있다. 적자에 시달리는 방송사들은 대규모 제작비를 투자하기 어려워져, 콘텐츠 품질 경쟁에서도 뒤처지고, 그래서 시청자의 이탈은 가속화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 방송사는 기술 혁신에서도 뒤처져 위기감을 고조시킨다. AI 등 새로운 기술을 활용한 혁신적인 서비스 개발은 엄두도 못 내고 있는 것이 우리 방송사들의 엄연한 현실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역대 정권의 방송 장악 시도와 그에 따른 인사 개입, 불공정 보도 등이 방송의 신뢰도를 크게 떨어뜨렸다. 이것은 단순히 특정 방송사의 문제가 아닌 한국 방송 전반의 신뢰 위기로 이어지고 있다. 한국 방송계가 직면한 위기가 단순한 일시적 현상이 아닌 구조적이고 정치적이며 복합적인 문제인 이유다.
생태계 위기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에 관한 위기는 단순히 개별 방송사의 문제를 넘어 한국 미디어 생태계 전반의 붕괴로 이어질 것이다. 방송의 공적 기능 약화는 사회 통합과 민주주의 발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특히 KBS나 EBS 등 공영방송의 위기는 단순히 방송사 하나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민주주의와 문화적 다양성, 그리고 공적 가치의 위기와 직결된다.
방송은 진실, 예술, 책임, 문화, 소통, 경험의 다차원적 가치를 구현하는 공기(公器)라고 볼 수 있다. 방송은 시청자들에게 매체를 통해 세상을 해석하게 하고 또 그 해석을 다시 세상에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인식과 문화를 끊임없이 재구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방송이 무너지면 이러한 문화적 역할과 공영성, 다양성이 축소되어, 우리가 숨 쉬듯 일상적으로 소비하는 콘텐츠의 풍부함과 수준도 저하될 것이다.
방송은 그 어원적 의미처럼, 우리 문화를 '널리(放) 보내고 전하는(送)'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한 ‘전파’의 차원을 넘어선다. 문화는 인간 사회의 정수(精髓)이자 영혼이다. 방송은 바로 이러한 문화, 즉 우리의 가치관, 생활양식, 예술적 표현을 담아내는 그릇이며, 동시에 사회를 변화시키는 강력한 힘이었다.
방송은 우리 국민들이 정보를 습득하고 여가를 선용할 수 있게 만드는 기특한 도구였다. 아울러 한국의 문화적 가치와 정체성을 구성하고, 사람들 사이를 연결해주는 ‘대중의 미디어’였다. 이러한 대중문화 미디어의 힘이 가장 극적으로 표출된 현상이 바로 한류다. 그리고 이 한류의 탄생과 성장, 세계적 확산의 중심에는 '방송'이 있었다. K-드라마와 케이팝을 통해 한국인의 삶과 정서, 가치관이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것은 한국의 대중 문화를 글로벌 무대로 확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공중파, 한류의 날개
방송은 한류를 통해 새로운 형태의 공론장을 구축했다. 전 세계 팬들이 한국 문화에 대해 토론하고, 자신들의 문화와 비교하며, 때로는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는 과정에서 국경을 초월한 문화적 담론의 장이 만들어졌다. 과거 서구 중심이었던 글로벌 문화 시장에서, 한국의 방송 콘텐츠는 독특한 문화 상품으로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했다. 이것은 한국 대중문화의 생산과 소비의 지형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더불어 한류는 방송을 매개로 인류의 보편적 정서, 즉 집단 무의식을 자극하는데 성공했다. K-드라마가 다루는 사랑, 가족, 성공에 대한 서사, 케이팝이 전달하는 열정과 도전의 메시지는 국적과 인종을 초월하여 공감을 얻었다. 문화의 힘은 결국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 있다. 방송은 이 문화의 힘을 증폭시키고 전파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고, 한류는 그 결과물이다.
한류 초기에 KBS의 “겨울연가”와 MBC의 “대장금” 같은 방송 드라마들이 아시아 전역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를 통해 한류의 기틀이 다져졌음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방송 드라마는 단순한 오락거리를 넘어 한국의 문화, 정서, 가치관을 전 세계에 알리는 문화 사절의 역할을 했다. 방송을 통해 전파된 한국의 이미지는 긍정적이었고, 이것은 한국 상품에 대한 선호로 이어져 경제적 효과까지 창출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후 케이팝의 성장기에도 방송의 역할은 중요했다. “뮤직뱅크”와 같은 음악 방송은 케이팝 아티스트들의 퍼포먼스를 전 세계 팬들에게 실시간으로 전달했고, “무한 도전” 같은 예능 프로그램은 아이돌의 다채로운 매력을 보여주는 장이 되었다. 특히 유튜브와 같은 온라인 플랫폼에 탑재된 ‘방송 콘텐츠’의 글로벌 확산이 가속화되면서, 한류는 더욱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즉 한국에서 ‘방송은 한류 콘텐츠의 기반(基盤)’이었던 것이다. 아울러 KBS 월드와 같은 국제방송 채널은 한국 문화를 해외에 소개하는 중요한 창구 역할을 했다. 이를 통해 한국 드라마와 케이팝이 아시아를 중심으로 전파되었고, 초기 한류 팬층 형성에 기여했다.
방송은 또한 한국의 연기자와 가수 지망생들을 스타로 만드는 강력한 미디어다. 드라마와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 수많은 한류 스타들이 탄생했고, 이들의 인기는 한류 확산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또한 방송은 드라마와 음악을 넘어 예능, 다큐멘터리, 음식 프로그램 등 다양한 장르의 콘텐츠를 제작하고 유통했다. 이는 한류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데 기여했으며, 한국 문화에 대한 다각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전통적인 TV 방송을 넘어 유튜브, 넷플릭스 등 온라인 플랫폼이 한류 콘텐츠의 글로벌 접근성을 크게 향상시켰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들 글로벌 플랫폼에 공급되는 상당수의 콘텐츠가 한국의 ‘방송을 통해 제작되고 유통된 콘텐츠’라는 사실이다.
"방송 없이 한류 없다"
결론적으로, 방송은 한류의 발원지이자 확산의 주요 동력, 그리고 지속적인 진화의 기반이 되어왔다. 콘텐츠 제작부터 유통, 그리고 문화적 영향력 확산에 이르기까지 방송은 한류의 모든 단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해왔다. 앞으로도 방송과 미디어 환경의 변화는 한류의 미래를 좌우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것이며, 이에 따라 ‘방송의 혁신과 적응 능력이 한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방송은 한류 콘텐츠의 근간이다. 방송의 붕괴는 콘텐츠 제작 생태계의 붕괴를 초래할 것이다. 방송사들은 오랜 기간 축적된 제작 노하우, 인프라, 인적 자원을 보유하고 있다. 방송이 무너진다면 이러한 제작 생태계가 붕괴되어, 고품질의 한류 콘텐츠를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재정 위기에 빠진 방송사를 살리는 것은 우리 사회의 건강성과 미래를 위한 중요한 투자다.
방송사 내부의 비효율적 경영과 변화에 대한 대응 부족 등은 질타를 받아 마땅하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살려야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특히 정치 권력이나 상업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워야 하는 공영방송은 다양한 의견을 공정하게 전달하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대변하며, 중요한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는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건강한 공론장 형성과 사회 통합에 필수적이다.
그렇지만 작금의 퇴행적 수신료 시스템을 개선하지 않고서는 공영방송의 위기는 해결될 수 없고, 그 여파는 결국에는 시청자의 부담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수신료 징수 및 행정에 들어가는 막대한 인력과 비용을 줄이는 일이 시급하다. 영국, 독일, 프랑스, 일본 등 해외 주요국의 수신료 사례에서 공영방송 재원구조의 안정성 제고 방안을 벤치마킹하여 ‘정성을 다하는 진정한 국민의 방송’이 제대로 공적 책무를 감당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콘텐츠 산업의 근간
아울러 방송은 연기자, 작가, PD, 스태프 등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성장하고 경험을 쌓는 중요한 플랫폼이다. 콘텐츠 산업의 인재들이 방송을 통해 역량을 키우고, 이후 OTT나 영화 등 다른 미디어로 진출하고 있다. 또한 방송은 여전히 국내에서 가장 큰 미디어 플랫폼이다. 방송이 무너지면 콘텐츠의 국내 유통과 소비가 크게 줄어들어, 한류 콘텐츠의 국내 기반이 약화된다. 강력한 국내 기반 없이는 해외 진출도 어려워진다. 현재 한류의 성공은 방송, 소셜 미디어, OTT 등 다양한 미디어의 유기적인 연계에서 가능했다. 방송이라는 핵심 축(軸)이 무너지면 이러한 생태계가 왜곡될 것이며 방송을 중심으로 형성된 한류 관련 산업(관광, 화장품, 패션 등)이 연쇄적으로 타격을 받게 된다. 이것은 한류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킬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방송은 그 어떤 매체보다 가장 효율적으로 공영 콘텐츠를 공급할 수 있는 매체라는 것이다. 방송은 전국적인 네트워크를 통해 거의 모든 가정에 도달할 수 있다. 인터넷이나 스마트폰이 보편화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디지털 격차가 존재하는 현실에서 ‘방송은 세대를 포괄하는 가장 보편적인 매체’다.
아울러 실시간으로 정보를 전달할 수 있으므로 재난 상황에서도 즉각적인 정보 전달이 가능하다. 이러한 특성들로 인해 방송은 여전히 공영 콘텐츠 제공에 있어 가장 효율적이고 영향력 있는 매체로 평가받고 있다. 물론 디지털 시대의 변화에 맞춰 방송도 진화해야 하지만, 그 본질적인 공적 기능과 영향력은 여전히 유효하다.
방송은 한류 콘텐츠의 생산, 유통, 소비, 확산의 모든 단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방송의 붕괴는 단순히 하나의 미디어 플랫폼의 소멸이 아니라, 한류를 지탱하는 전체 생태계의 붕괴를 의미한다. 따라서 방송의 건강성 유지는 한류의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물론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따라 방송의 형태와 역할은 변화할 수 있지만, 그 본질적 기능과 중요성은 여전히 유효하다. 미디어 환경이 변화하고 OTT 플랫폼이 부상하는 가운데서도, 방송의 본질적 기능인 '좋은 이야기를 널리 보내고 감동을 전하는 역할‘은 여전히 중요할 것이다.
반성(反省)과 경각(警覺)
더 이상 늦어지면 안될 것 같아 ‘붕괴 위험에 직면한 우리 방송을 살려야 하는 이유’를 경각(警覺)하고자 적어 보았다. 그렇지만 방송사에서 일하고 있는 당사자의 읍소(泣訴)라서 매우 면구(面垢)스럽다. 먼저 깊은 사과와 반성을 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본연의 역할에 소홀하고 종종 그 책임을 망각했다. 공정성과 객관성을 잃어버린 채 편향된 보도를 내보냈고, 자극적인 콘텐츠로 시청자의 관심만을 끌려 했으며, 진실을 추구하기보다는 손쉬운 선정주의에 빠졌고, 사회적 약자의 목소리를 담아내지도 못했다. 새로운 디지털 미디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채, 구태의연한 방식에 안주했다. 젊은 세대와의 소통에 실패했고, 혁신의 기회를 놓쳤다.
때로는 권력과 자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방송의 독립성과 공정성을 지키지 못했다. 방송인으로서 가져야 할 비판적 시각을 잃어버리고, 크레딧(credit)만 챙겼다. 제대로 만들지도 못하면서 한류 정경에 편승하며 현실에 안주했다. 뼈아픈 반성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부끄럽고도 너무나 죄송하다.(끝)
작성일: 2024년 8월 31일
글쓴이 배기형은 1991년 KBS에 PD로 입사해 "체험 삶의 현장" "연예가중계" 등 다수의 교양 및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전 세계에 배급한 이력이 있다. 국제문화교류와 한류 콘텐츠 전문가로서 주요 국제기구의 총회와 콘텐츠 포럼에서 초청 연사 및 진행자로 활약했다. 문화콘텐츠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