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 '저급한 동아시아 대중문화' 그리고 '최첨단 글로벌 놀이문화' 사이에서...2024년 독일 베를린에서 본 케이팝 팬덤 관찰기
정수경 |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연구원
2024년10월14일, 독일 공영방송 ARD의 지역 방송인 베를린-브란덴부르크(RBB)에서 케이팝을 전면에 내건 정규 라디오 프로그램이 첫 방송을 시작했다.
젊은이들을 주 대상으로 하는 24시간 음악채널 Fritz (102.6 MHz)에서 월요일 저녁 8시부터 10시까지 격주로 방송된다. 이 시간은 원래 ‘베스트 뮤직 글로벌 팝(Beste Musik Global Pop)’이라는 타이틀로 독일의 젊은 층에게 최신 인디 음악이나 얼터너티브 록과 팝, 글로벌 차트 히트곡들을 소개해왔다.
그러던 것이 이번 가을 개편을 맞아 한 주는 케이팝을, 다른 한주는 ‘오리엔탈 팝’이란 제목하에 터키와 중동, 동유럽의 음악을 들려주는 것으로 대폭 변화를 주었다. 그만큼 케이팝이 독일의 젊은 청취자들 사이에 동시대의 글로벌 팝을 대표하는 음악 장르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스트 뮤직 케이팝 (Beste Musik K-pop)’의 진행을 맡은 유스틴 팀페(Justin Timpe)는 프로그램 인사말에서 단순히 최신 케이팝 음악을 소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케이팝 팬들과 함께 “BLACKPINK와 김치, BTS와 비빔밥, 뉴진스와 이태원 클라쓰, (G)I-DLE, 오징어 게임 등 한국의 다양한 문화를 이야기하는 커뮤니티”로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베스트 뮤직 케이팝’ 들어보기)
케이팝 품은 독일 방송
유럽에서 비교적 늦게 한류 바람이 분 독일에서도 케이팝 전용 인터넷 라디오 채널과 팟캐스트 방송은 이전부터 있었다.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독일의 주류 매체와 라디오 방송에서 시도 때도 없이 흘러나왔던 2012년 이후부터 케이팝 팬덤이 눈에 띄게 늘기 시작하면서 베를린과 뮌헨에서도 온라인 음악 방송사들이 하나둘 케이팝 채널을 개설하고 운영해왔다.
그러나 공영방송 라디오에서 케이팝만 다루는 프로그램을 편성한다는 건 차원이 다른 얘기다. 꾸준히 들어주고 같이 이야기 나눌 청취자들이 상당수 형성돼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무엇보다 청소년들을 겨냥한 라디오 채널에서 케이팝을 독립된 프로그램으로 설정했다는 사실은 독일 기성세대들이 청소년과 소통하는 키워드로 케이팝을 인식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독일 청소년들과 케이팝을 이야기할 때 음악만 가지고 말할 수 없다. 케이팝 생산자들 스스로도 케이팝은 ‘듣는 음악이 아니라 보는 음악’이라고 정의하듯, 춤을 떼어 놓고 케이팝을 이야기할 수 없다. 실제로 케이팝 애청자를 자처하는 독일 청년들과 얘기하다 보면 좋아하는 노래 구절이나 후렴구를 읊을 때 손과 발이 저절로 안무를 따라가는 모습을 심심치않게 본다.
이들은 ‘댄스’라는 신체 언어를 통해 동아시아의 낯선 언어의 장벽을 뛰어넘고 정서적 공감대와 재미를 공유한다. 커버 댄스를 추다가 친구를 만나기도 하고 팀을 결성해 대회에 나가기도 하며 아예 전문 댄서로 진로를 개척하기도 한다. 만약 음악만 있었다면 케이팝을 보고 즐기고 따라부르며 주체적 만족감을 느끼는 일도, 친구들과의 유대감을 높이는 일도, 일상의 힘겨움을 위로하는 일도 이토록 오래 지속하지 못했을 것이다. 케이팝의 해외 수용에 있어서 춤은 어쩌면 음악보다 더 중요한 요소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스우파, 꿈의 무대
내가 속한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에 진학한 학생들 중에는 전문 댄서로 활동하는 이들도 몇 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플루언서로 통하는 이들은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가서도 춤추는 일을 멈추지 않는다. 한국의 대학에서 수업을 받는 시간을 제외하면 케이팝 댄스를 전문적으로 배울 수 있는 사설 학원에 등록해서 시간을 보낸다.
작년에 교환학생으로 한국에 갔던 한 친구는 ‘저스트 절크’라는 힙합 기반의 댄스팀이 창설한 아카데미에서 춤을 배운 시간을 교환학생 기간 동안 가장 행복했던 기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녀는 한국 친구들이 싼 연습실을 이용하기 위해 새벽에 춤을 추는 이른바 ‘새연(새벽연습)’ 문화를 주제로 졸업논문을 쓸 계획이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 11시에 연습실에 모여 동이 틀 때까지 춤 연습을 하고 다시 학교로, 직장으로 돌아가는 한국의 젊은 친구들에게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그녀는 이들이 왜 이토록 힘들게 춤을 추는지, 몸이 부서져라 밤을 불태울만큼 각자에게 춤은 어떤 의미인지를 알기 위해 교환학생 기간이 끝나고도 틈틈이 한국을 방문해 체험과 관찰, 인터뷰를 이어가고 있다.
케이팝 댄스에 대한 열정이 커지는 만큼 케이팝의 본고장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싶은 욕구도 커지는 건 당연지사일 터. 유럽의 각 지역에서 개최되는 케이팝 커버댄스 대회에서 상을 받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댄스 대회에 나가서 그동안 갈고 닦은 기량을 선보이고, 할 수만 있다면 전문 댄서팀의 크루로 발탁되어 활동하고 싶은 것이 이 학생들의 꿈이다.
필자가 한국 리얼리티쇼 연구차 현장 조사를 나간다고 했을 때, ‘스우파 (엠넷 댄스 서바이벌 ‘스트릿 우먼 파이터’)’ 연출자를 꼭 만나서 자신들 얘기를 해달라고 애교 섞인 부탁을 하기도 했다. 현재 이 약속은 나에게 숙제처럼 남아있다.
개방 탈중심 수평
그런데 케이팝 댄스가 유럽을 비롯한 전세계의 청소년들에게 널리 확산될 수 있었던 기반은 실력을 겨루고 순위를 매기는 케이팝 산업의 치열한 경쟁 구조에 있지 않다. 오히려 해외 팬덤에서 케이팝은 그 반대편에 서있다. 유튜브에 무수히 업로드 된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 (K-pop random play dance) 동영상을 보면 케이팝 댄스가 해외 팬덤 사이에서 어떻게 향유되고 있는지 한눈에 볼 수 있다.
케이팝 랜덤 댄스는 대형 쇼핑몰 앞 광장이나 학교 운동장, 공원 등에서 사각형으로 무대 경계선을 만들어놓고 스마트폰과 연결된 블루투스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놓으면 가장자리에 대기하고 있던 참가자들이 무대 안으로 뛰어들어 일제히 춤을 추는 방식이다. 노래마다 안무가 다르니 춤을 출 수 있는 노래에 따라 새로운 참가자들이 들고 나는데, 걔중에는 아이돌같은 복장을 하고 수준급의 춤실력을 자랑하는 이들도 있지만 평범한 젊은이들이 대부분이다.
한곡 당 약 1분 내외의 짧은 곡들이 4초 간의 카운트다운 신호를 사이에 두고 계속 이어지기 때문에 안무를 아는 노래에만 부분적으로 참여하고 아무 때나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도 된다. 또 무대 전면과 후면의 구분도 따로 없고, 안무 역시 원곡의 핵심 동작을 따라하되 즉흥적으로 변화를 주기도 한다. 행사 주최 그룹은 따로 있지만 그들은 춤판만 마련할 뿐 춤을 주도하거나 통제하지 않는다.
이런 개방성과 탈중심성, 즉흥성 때문에 케이팝 랜덤 플레이 댄스 참가자들은 누구나 부담없이 춤을 추고 즐긴다. 특별히 주목받은 일도, 딱히 이뤄낸 것도 아직은 없는 빈약한 세대지만 광장에 그어놓은 사각형 무대 안에서는 모두가 주인공이 된다.
케이팝을 매개로 자신의 감정과 느낌을 마음껏 춤으로 드러내고 표현하는 이들의 집단적 경험은, 무언가를 달성해야 한다는 목적도 의도도 없지만 ‘함께 있다’는 그 자체만으로 ‘우리’를 느끼고 모두가 평등하게 소통하는 ‘무위의 공동체’를 형성한다고 문화연구자들은 입을 모은다.
‘미성숙’과 ‘열광' 사이
하지만 이들의 몸짓이 온전히 이해되기에는 세상의 벽이 아직은 높고 두텁다. 저녁이면 성장(盛裝)을 하고 베를린 필하모니나 오페라 하우스를 찾는 독일의 기득권 엘리트층에게 케이팝은 저급한 싸구려 대중문화일 뿐이다. 이따금 주류 매체에서 특집 보도나 다큐멘터리로 한류의 성행을 호기심 있게 다루기도 하지만, 이들 기성세대들에겐 동아시아의 팝음악과 댄스에 매료된 자국의 아이들이 한심하고 못마땅하기만 하다.
이들에게 케이팝 산업은 재능있고 예쁘장한 아이들을 가혹하게 훈련시켜 노래하고 춤추는 기계로 만들어내는 공장이며, 그렇게 찍어낸 아이돌들은 천편일률처럼 비슷한 노래와 춤을 반복한다고 여긴다. 케이팝 아이돌에 빠진 아이들은 나긋하고 매끈한 동양 남자를 사귀고 싶어하는 미성숙한 여자애들일 뿐이라고 비하하기 일쑤이다.
케이팝의 본산지 한국은 어떤가? 해외 팬덤을 보도할 때 드러나는 은근한 자부심 외에 케이팝의 해외 수용에 대한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관심사는 비즈니스적인 가치에 집중돼 있다. 어떤 그룹의 어떤 노래가 해외에서 인기를 끌고, 각 나라 온라인 음원 사이트에서 몇 위를 했는지, 앨범과 콘서트는 얼마나 많이 팔렸는지가 주된 화제다.
가끔은 이조차도 국격을 높인 문화외교, 소프트파워로 해석된다. 이러한 태도나 시각은 케이팝을 통해 한국을 좋아하게 된 유럽의 아이들에겐 상당히 실망스러운 경험을 주기도 한다.
케이팝이 돈 벌이?
올 초 베를린 자유대 특강으로 ‘팬덤 경제학’을 주제로 케이팝 팬커뮤니티 결제시스템과 앱 설계에 대해 소개한 적이 있다. 그런데 강연을 들었던 학생들 표정이 썩 좋지 않았다. 행복을 좇는 자신들의 행위를 돈으로 환산하는 케이팝 비즈니스 세계가 영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과는 다른 사회문화 체계 속에 살고 있는 유럽의 아이들에게 음악은 공공재에 가깝다. 물론 용돈을 아끼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의 음반과 굿즈를 사고 콘서트를 가기도 하지만, 음악은 라디오나 인터넷에서 쉽게 들을 수 있는 무료 콘텐츠라는 인식이 더 크다.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내는 한달 20유로(약 3만원 수준)의 공영방송 수신료가 기본적인 콘텐츠 지출값이다. 또 스포티파이, 유튜브, 아이튠즈, 넷플릭스 등의 구독료도 청소년들에겐 적잖은 비용이다. 수익의 절반 가까이를 세금으로 내는 대신, 문화콘텐츠는 공적 자원으로 널리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 독일 사회의 기본 인식이다. 이러한 태도는, 최애 그룹의 신규 앨범을 인기 순위 1위로 만들기 위해 초동 판매율을 올리고 음원사이트에서 무한 청취하는 열성 팬이기를 요구하는 케이팝 비즈니스와는 분명히 커다란 간극이 있다.
주류 사회가 강요하는 문화적 엄숙함과 정숙성, 자본이 요구하는 상업성 사이를 횡단하며 자신들만의 사회문화적 정체성을 발산해온 유럽의 케이팝 팬들로서는 공영방송 라디오 채널에 마련한 작은 아지트가 결코 작게만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글로벌 놀이 '케이팝'
이 글을 쓰는 동안 블랙핑크 멤버였던 로제가 부르노 마스(Bruno Mars)와 협업해 솔로 데뷔곡 ‘아파트’를 출시했다. 별다른 소품도 없이 온통 분홍색만 가득한 배경에 검은 가죽자켓을 입고 흥겹게 춤을 추는 두 가수의 B급 감성 충만한 뮤직비디오를 봤다면 누구라도 금세 ‘대박’을 예감했을 것이다.
강한 드럼 비트에 맞춰 반복적으로 외치는 ‘아파트’로 시작해 가볍고 통통 튀는 펑크록 사운드로 이어지는 이 노래는 공개와 동시에 전세계 음원 차트 1위를 장식하고 있다. 유튜브에선 세계 각지의 젊은이들이 감상평과 커버송, 커버댄스를 쏟아내면서 새로운 놀 거리의 출현을 반기고 있다.
그 중에는 베를린의 한 클럽에서 젊은이들이 아파트를 외치며 춤을 추는 장면도 있었다. 이미 전세계의 청소년들이 즐기는 놀이문화로 자리잡은 케이팝이 로제의 ‘아파트’를 계기로 제 2의 ‘강남스타일’ 현상을 맞이할 수 있을 것인지 자못 기대가 크다. 신곡 케이팝을 통해서 세계의 젊은이들이 또 한 번 신바람나게 뛰고 구르고 소리지르며 놀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한데 어울려 국가도 인종도 언어도 세대도 구분없는 한판 축제의 놀이판을 벌이면 좋겠다. (끝)
작성일: 2024년 11월 1일
글쓴이 정수경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방송작가로 일하며 시사 및 역사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산업과 장르, 생산과 수용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를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