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해외 시장이 주목하는 K-드라마의 무기는 '소재'일까, '인력'일까?"...K-의 보편적 미래를 꿈꾸며
이수지 | 디렉터스초이스 감독
패션계에서 타탄체크(tartan check)는 역사가 깊은 산물이다. 13세기 스코틀랜드의 고대 씨족(Clan)들은 각자의 가문을 나타내는 고유의 색상과 무늬로 자신을 표현했다. 각 씨족이 점유한 지역과 계급을 나타내던 격자들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복잡한 체크무늬로 발전했다. 가문의 일족 중 한 명이 큰 공로를 세우거나 결혼과 가정 독립이 이루어질 때 다른 색상과 굵기의 선들을 추가한 결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오늘날의 타탄체크가 형성된 것이다.
수많은 세기가 흐르고, 타탄체크는 패션브랜드 D&G의 2008년 런웨이 테마이기도 했지만 한편에선 ‘공대생의 체크 남방’으로 너드(Nerd) 감성을 상징하기도 했다. 저 멀리 유럽 국가의 고대 가문 몇몇이 소유했던 타탄체크는, 현대에 이르러 하이패션부터 SPA 브랜드까지 클래식 무드를 대표하는 전 세계 공공재가 되었다.
이처럼, 특정 소재는 국경과 시대, 주요 타겟을 초월해 자유롭게 활용되고 확장될 수 있다. 타탄체크가 스코틀랜드를 대표하는 문화 자산으로 시작해 보편적인 패션 소재가 되었듯, 문화의 소재는 시간이 흐르면서 누구에게나 공유되고 활용될 수 있는 자산이 된다.
K-드라마가 글로벌 OTT와의 협업을 통해 전 세계로 뻗어가고 있는 현상에서 눈에 띄는 점은, 소재보다는 인력의 강점에 더욱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글로벌 시장에서 K-드라마가 러브콜을 받는 이유는 단연 인력, 즉 창작자들의 뛰어난 능력에 대한 인정 때문인 경우가 많다.
한국의 창작자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고유의 독창성을 키우며, 탁월한 작업 효율과 섬세한 감성을 제공한다는 평가를 받지만, 소재의 보편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기반으로 한 확장성은 다소 부족하지 않나 싶다. 이 글에서는 K-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서 지속 가능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소재의 확장성과 보편성이 얼마나 중요한 경쟁적 요소가 될 수 있는지 몇 가지 사례를 통해 논하고자 한다.
할리우드의 아시아 영화
아서 골든의 소설 “게이샤의 추억”을 각색한 동명의 영화 "게이샤의 추억(Memoirs Of A Geisha, 2005)"은 개봉 당시 영화의 메타적 요소들로 인해 논란에 휩싸였다. 원작 소설을 집필한 작가는 미국인이며, 영화 또한 미국인 스티븐 스필버그가 제작했고 미국 감독 롭 마셜이 연출한 할리우드 영화로 공표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미국인의 시선에서 만들어진 작품의 서사 배경이 일본인 점, 주인공인 게이샤 ‘사유리’를 연기한 이는 중국 대표 배우 장쯔이인 것이 문제가 됐다. 더하여 흥미로운 것은 영화의 대사가 영어로 흘러가면서도 이따금 작품 스스로가 메타인지 지점을 콕 집어 건드린다는 것이다. 가령 주인공이 선배 게이샤에게 “おねえさん(‘언니’), Thank you.”라 말하는 국적 불명의 대사가 튀어나왔을 때 관객들은 순간 움찔하며 귀를 의심하게 되는 것이다.
중국 누리꾼들은 중국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게이샤로 출연한 것을 두고 “민족감정을 해쳤다”고 비판했으며, 중국 국가방송영화총국은 중국 내 영화 개봉을 금지하기에 이르렀다. 이 영화의 객관적 지표는 로튼토마토 관객점수 83%, IMDb 평점7.4/10으로 괜찮은 편이지만, 중국 내에선 자국의 국민 배우에게 기대했던 암묵적 지조가 무너진 사안이 작품성을 넘어 가장 중요한 이슈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분석하는 의견도 상당하나, 본 글에서는 해당 논의는 다루지 않았다.)
영화의 향방을 쥐고 있던 미국 제작진들 또한 지탄을 받았다. 미국인 관점에서 ‘어쨌든 아시아인이 연기하는 거라면, 뭐.’로 뭉뚱그려진 "게이샤의 추억"이 정체불명의 아시아 이미지를 만들었다는 혹평을 벗어나지 못했다.
할리우드가 타국의 역사적 단편을 영화화한 이력은 이 작품뿐만이 아니다. 미국 영화 시장은 "벤허", "글레디에이터" 등 로마 제국 시대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에서도 큰 흥행을 기록해왔다. 사실상 이탈리아 사극이라 볼 수 있는 소재들을 두고, 서구권은 앞서 말한 타탄체크처럼 이를 공용의 자산으로 활용해 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미국과 동아시아 사이의 기나긴 거리감 때문일까. '게이샤의 추억'에서 발생한 논란을 곱씹다 보면 '벤허'나 '글레디에이터'도 ‘미국산 로마 제국 영화들은 백인들이 출연한 옛날 옛적 배경의 이야기이니 따지지 말고 그저 명작으로 감상하자.’라며 쉬이 여기기가 어려워진다. 필자 역시 비슷한 맥락의 다국적 프로젝트 제안을 받으며 이 문제를 더욱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다국적 프로젝트
한류가 세계를 흔들고 글로벌 OTT로 모두가 한국 작품들을 시청할 수 있게 된 덕으로, 사뭇 독특한 형태의 제안을 받은 몇 가지 경험이 떠오른다. 그 중 하나는 한국과 일본이 공동 제작하는 드라마인데, 원작은 한국 웹툰이고 각색은 일본에서 진행하며 감독과 제작진은 한국에서 투입, 배우들은 한국인과 일본인이 섞인 조합이었다. 오리지널 방영은 일본에서 한 후, 글로벌 OTT로 추가 유통 계획을 지닌 계획이다.
제안을 받은 연출자인 필자의 머릿속에 다양한 물음표가 떠올랐다. 대사는 일본어인지? 만약 그렇다면 일본어가 가능한 한국 배우들을 요하는 것인지? 주 배경은 어느 나라로 정할 것인지? 더구나 한국과 일본은 같은 아시아권이라 하더라도 서로 다른 정서를 가진 가깝고도 먼 나라라고 칭하지 않는가. 원작자와 감독은 한국인이고, 각색 작가는 일본인인 상황에서 그 간극을 중재할 커뮤니케이터는 양국의 정서를 모두 함유할 수 있을 것인지…
다른 사례는 이러했다. 인도네시아 로컬 OTT에서 기획하는 오리지널 드라마인데, 창작 주체들인 작가, 감독과 스태프는 한국에서 등용하고 인도네시아 배우들이 출연하지만 감성은 글로벌을 타겟으로 하는 로맨스를 만든다는 계획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국 제작진과 협력하려는 목적을 정확하게 말했다. “한국 제작진이 로맨스 드라마를 만드는 노하우를 흡수하고 싶습니다.”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라는 말이 와 닿듯 타국의 드라마 산업 주체들은 한국인들의 창작력으로 세계 무대에서의 유리함을 꾀하려 한다. 승률이 높은 시장에 기회와 사람, 자본이 모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고, 계산기를 두드리자면 응당 가능한 거래이다.
운동선수들도 타국의 프로 리그에 진출하고, 국내 제작진이 해외 뮤지션의 뮤직비디오를 만드는 사례도 빈번하니 노하우를 수출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일 것이다. 하지만 위의 제안들에서 무언가 어색함을 느낀 이유가 무엇일까.
K-라벨의 한계?
혹자는 “그냥 일인데, 가타부타 따지지 말고 하면 되지 뭐.”라고 조언하기도 했지만, 어딘가 썩 내키지 않는 오묘한 심정으로 고민을 거듭하고 고사하는 과정에서 이러한 의문이 들었다. ‘타탄체크 머플러는 세계 도처에 깔려 있고 미국인들은 게이샤와 로마 제국 소재로 막대한 돈을 버는데, 우리라고 타국의 이야기를 못 만들 이유가 딱히 있다고 느끼는 걸까? 왜 이쯤에서 망설이게 되는 걸까.’
수식어 ‘K-’로 명명된 한국의 문화 상품들이 활약을 펼친 덕분에 국내 창작자들이 해외 진출의 기회를 갖게 되는 것은 매우 감사한 일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되놈이 번다’는 속담에 처할까 그 기회 앞에서 우선 주춤하게 되는 이면도 존재한다.
일명 ‘K-라벨’이 붙은 콘텐츠가 상향 평가되는 분위기에 비교적 가뿐하게 편승하려는 목적, 소문난 한국인의 성실함과 강도 높은 노동력에서 효율 좋은 고퀄리티를 기대하는 점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필자의 경험이 전부를 설명하기에는 무리가 있겠으나, 적어도 경험한 바에서 해외 산업체들이 K-콘텐츠와의 연합을 통해 얻고자 한 것은 ‘창작의 근원지가 한국이다’라는 태그와 ‘한국 창작자의 How-to’였다.
결국, K-드라마 산업 경쟁력이 ‘인력’ 그 자체에 가장 큰 주안점을 두고 있음을 그들이 거꾸로 알려준 셈이 아닐까.
"게이샤의 추억" 주연인 장쯔이는 자신에 대한 논란에 대해 이렇게 반박했다. “할리우드 영화에서 중국인이 주연을 맡을 기회는 많지 않으며, 그로 말미암아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주류 시장에서 살아남고자 한 그녀의 주장은 매우 솔직하고 현실적임에도 중국 민심은 한동안 비판적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일본 본토에서의 반응은 꽤 긍정적이었던 것으로 보도됐다. 개봉 당시 일본에서 개최된 시사회에서 "게이샤의 추억"의 중국인 주연 배우들은 대대적 환영을 받았으며, 영화 "킬빌"과 "라스트 사무라이"와 같이 사무라이 테마를 도입한 할리우드 작품들이 일본 내 큰 인기를 보였다는 언론 보도가 이어졌다.
소재와 인력의 경계
사무라이 코드와 게이샤의 이야기, 로마 제국의 서사 그리고 패션계 누구나 활용하는 타탄체크의 공통점은 ‘소재’라는 것이다. 반면 일본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중국 배우 장쯔이, 그리고 "게이샤의 추억"을 연출한 미국 감독 롭 마셜은 ‘플레이어’에 해당한다. 소재나 플레이어 모두 서사물의 성패를 좌지우지하는 주요 요소들이지만 한쪽은 발현 지역을 벗어나 자유분방하게 활용되는 반면 한쪽은 귀속된 배경 정보와 함께 대중의 심판을 예고 받는다.
특정 소재도, 플레이어도 모두 본진이 존재하는 건 마찬가지지만 플레이어에게는 상대적으로 더 엄격한 논지가 부착된다. 소재는 국경 너머의 ‘활용’으로서 확장성이 용인될 여지가 있지만 플레이어가 다른 무대에서 활약하는 것은 대중에게 ‘수용’되어야 하는 영역일까.
'K-드라마'의 영향력을 자아내는 창작자들은 해외에서도 높은 가치로 평가받고 있지만, 인력의 수출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마냥 화답하기에는 조심스러운 접근이 필요하다. 한국 플레이어들의 능력과 잠재력은 K-드라마 경쟁력의 분명한 특징이고 핵심이다.
한국 드라마 특유의 감성에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모두가 알법한 ‘느낌적인 느낌’이 있지만, 그보다 더 뚜렷하게 쥘 수 있는 강력한 소재가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우리의 경쟁력이 인력에 의지하는 정도가 높을수록 지속적인 영향력을 연장하기에 위험 부담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K-서사에서 튀어나온 알맹이 또한 타탄체크와 로마 제국의 이야기들처럼 보편적이고 시대를 초월한 소재로 확장되기를 바란다면 다소 막연한 심산일까. 지구인들의 공통 분모 속에 오래 남을 소재이지만, 그 기원을 거슬러 가면 한국에서 그 근원이 발견될 알맹이 말이다. (끝)
작성일: 2025년 1월 16일
이수지 | 이화여대 학사, 카이스트 석사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드라마, 영화를 연출하며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는 영상 콘텐츠 기획을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