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론] 블랙핑크는 '어떤' 혁명인가?

이소윤 | 시카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BLACKPINK is the Revolution (블랙핑크는 혁명이다).

명실공히 케이팝을 대표하는 걸그룹 블랙핑크의 미니 1집 <Square Up>의 수록곡 “Forever Young”에 등장하는 가사다. “BLACKPINK in your area (블랙핑크 인 유어 에리어)”라는 시그니처 사운드가 훨씬 더 잘 알려져 있긴 하지만, 이 가사도 꽤 유명하다. 그룹으로서는 YG 엔터테인먼트와 재계약을 했지만, 개인으로서는 모두 홀로서기를 선언한 블랙핑크 멤버들이 인상적인 행보를 보여주고 있는 지금, 이 평서문을 한 번 의문문으로 비틀어 볼 필요를 느낀다. 블랙핑크는 정말 혁명인가? 블랙핑크의 성공이 시사하는 바는 무엇인가?

“걸그룹 전성시대”가 열렸다고들 이야기하지만, 케이팝 걸그룹에 관한 학술적 논의는 여전히 부족하다. BTS에 관해서는 학회가 열릴 정도로 학술적 연구가 활발하지만, 블랙핑크에 관한 연구는 그들의 사회문화적 영향력에 비해 놀랍도록 적다. 여성 연구자로서 케이팝 걸그룹을 연구하고 논의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지만 활동가이자 연구자 연혜원의 기획 아래 2021년 출간된 <퀴어돌로지>나 2024년에 여성 독서 커뮤니티 들불이 주최한 <케이팝 하는 여자들> 토크가 보여주듯, 케이팝에 대한 다양한 여성의 발화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은 계속 공유돼 왔고, 앞으로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입각하여, 블랙핑크의 세계적인 성공을 2000년대 한국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여성 연구자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블랙핑크와 검정분홍 사이

블랙핑크는 어떻게 세계적인 걸그룹으로 성장했는가?

YG 엔터테인먼트가 축적한 자본과 인지도도 큰 역할을 했을 것이고, 기획 초기부터 해외를 타겟팅한 전략, 테디를 비롯한 YG 프로듀서진, A&R 팀 등 사내 여러 조직의 제작 노하우도 당연히 기여했을 것이다. 그리고 블랙핑크의 어마어마한 소셜 미디어 지표가 보여주듯, 세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블링크 (블랙핑크의 팬덤 이름)의 역할도 당연히 빼놓을 수 없다.

그렇지만 이 같은 설명은 다른 대형 기획사에서 데뷔하여 좋은 성적을 보여주고 있는 걸그룹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왜 많은 걸그룹 중 블랙핑크인가? 이제는 ‘어떻게’와 ‘왜’를 동시에 질문해야 할 때다. 이를 위해서는 블랙핑크를 낯설게 보기 시작해야 한다. 왜 YG엔터테인먼트는 ‘블랙’과 ‘핑크’의 조합을 택했을까? 만약 블랙핑크의 이름이 블랙핑크가 아니라 “검정분홍”이었더라도, 그들이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그룹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다음은 2016년 YG 엔터테인먼트의 공식 블로그에 게시된 기사에서 발췌해온 내용이다.

YG 관계자는 블랙핑크라는 이름에 대해 “블랙핑크는 가장 예쁜 색으로 표현 되는 핑크색을 살짝 부정하는 의미로서 ‘예쁜 게 다가 아니다’라는 반전의 의미로서 담고 있다. 외모와 실력을 함께 겸비한 팀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라고 전했다. 또한 스페셜한 상품 앞에 ‘블랙’이라는 명칭이 붙여지는 것처럼 ‘스페셜한 여성그룹’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일견 단순해 보인다. 그렇지만 하단의 자료를 보면 이가 치밀히 설계된 직관성임을 알 수 있다. SM, YG 엔터테인먼트 등에서 여러 아티스트의 비주얼을 담당한 장지민 디렉터는 2023년 펴낸 책 <비주얼 브랜딩의 비밀>에서 블랙핑크의 초기 기획 과정에 대해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블랙핑크가 데뷔하기 전에 그룹 이미지를 세팅하는 작업을 한 적이 있다. 그룹 이미지 세팅에는 그룹 내 개개인의 이미지 포지셔닝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당시 나는 먼저 4명의 멤버들 이미지를 각기 따로 분석했다 (...) 당시 내가 4명의 멤버들에게 부여한 이미지는 각각 ‘사랑스러운,’ ‘고급적이고 화려한,’ ‘스포티한, ‘시크한’ 같은 비주얼 키워드였다. 나는 이 키워드로 멤버들의 이미지를 규정하고, 해당 단어들을 멤버들이 더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이미지보드를 만들어 보여주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이 과정에서 쉬운 이해를 도울 수 있도록 특징이 있는 여성 패션 브랜드의 광고 이미지들을 많이 참고하였다.

그런데 최근 이 자료들을 확인해 보니 사랑스러운 얼굴과 시크한 ‘피지컬’을 가지고 있는 로제의 경우 ‘생로랑’이라는 브랜드의 이미지들을 다수 구성하여 트레이닝한 사실을 발견했다. (...) 그리고 현재 생로랑의 앰버서더로 활동하고 있는 로제의 모습을 보면, 개인에 대한 이해와 아이덴티티를 고려한 비주얼 브랜딩, 즉 비주얼 디렉팅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장지민, <비주얼 브랜딩의 비밀>, pp. 136-137)

케이팝의 핵심은 ‘그룹’이다. 개별 멤버의 개성이 드러나면서도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몇 년에 걸쳐 서서히 진화하는 이야기를 담아낼 수 있는 그룹의 이미지와 서사를 구축하는 것이 중요하다. 블랙핑크는 이런 의미에서 혁명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고전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남성성과 여성성, 힙합과 팝, 영어와 한국어, 서구와 비서구를 ‘블랙’과 ‘핑크’라는 상징 속에 담아내며 ‘이중성’ 그 자체를 그룹의 정체성으로 확립했다. 이는 순환 논증처럼 작용하며 블랙핑크가 ‘귀여운 (핑크)’ 컨셉과 ‘카리스마 있는 (블랙)’ 컨셉을 오가는 것에 대한 정당성을 부여해 준다. 분열적인 여성 주체성은 ‘반전 매력’으로 상품화되며, 전통적인 아름다움과 여성주의적 가치관 사이의 모순이라는 사회적 의제는 블랙핑크의 상업적 성공 하에 묻힌다.

색깔과 걸그룹 브랜딩

그렇지만 위와 같은 브랜딩 과정과 산업의 관행에 대한 설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왜 이런 브랜딩 전략이 탄생했을까? 블랙과 핑크의 조합이 탄생한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케이팝 산업에서 ‘색깔’이라는 기호가 많은 역할을 수행해 왔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걸그룹-보이그룹의 이원화된 구조 속 걸그룹의 젠더 표현과 강하게 결부되어 왔음을 이해해야 한다.

에이핑크, 레드벨벳, 레드스퀘어, 오렌지 캬라멜, 레인보우, 퍼플키스, 핑크 판타지, 그레이시(G-reyish), 골든 차일드, 비투비 블루 등 수많은 예가 보여주듯, 케이팝 그룹이나 유닛이 이름에 색깔을 활용한 예는 2000년대 이후로 꾸준히 발견되지만, 걸그룹의 수가 압도적이다. 또한 케이팝 산업 속에서 색깔은 아티스트와 팬덤의 관계를 상징하고 강화하기 위해서도 사용되어 왔으며, 아티스트의 공식색이라는 문화로 굳어졌다. 그러나 이는 아티스트 간의 경계뿐 아니라 팬덤의 경계를 명시함으로써 팬덤 내부의 결속을 강화하고 ‘타팬’을 배제하는 역할도 수행해 왔다. 공식색 이외에도 색깔은 아이돌 멤버의 머리색이나 렌즈 색상, 퍼스널 컬러 등의 영역에서 생산과 소비를 잇는 주요한 기호로서 기능하고 있다.

여기서 블랙핑크가 데뷔하기 전의 걸그룹 지형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케이팝 그룹과 팬덤의 공식색에 관심을 기울여온 사람이라면 쉽게 눈치챌 수 있는 사실이지만, 주요 2세대, 3세대 걸그룹의 공식색은 유독 분홍색과 빨간색으로 수렴하는 경향을 보인다. 소녀시대의 파스텔 로즈부터 원더걸스의 펄 버건디, 2NE1의 핫핑크, 카라의 피치펄, 에이핑크의 스트로베리 핑크, 트와이스의 애프리콧과 네온 마젠타까지. 이 외에도 걸그룹의 브랜딩이나 앨범에서 핑크색이 사용된 예는 무수히 많다.

색의 '성' 정체성

이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분석이 있을 수 있겠지만,  필자는 이 ‘핑크’가 20세기 후반부터 여성성, 퀴어함, 젠더/섹슈얼리티 이슈의 초국가적 상징으로 자리 잡은 현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본다. 역사학자 조 파올레티 (Jo Paoletti)의 연구에 따르면, 미국에서 19세기 후반까지는 색과 성별은 큰 연관이 없었으나, 20세기 초반부터 아동을 타겟으로 한 마케팅에 색을 성별을 구분하는 코드로 사용하기 시작하며 핑크는 여성성, 블루는 남성성을 상징하는 색으로 고착화되었다고 한다.

이와 같은 문화적 코드는 미국 대중 문화의 전세계적인 확산에 따라 여러 문화권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핑크는 이제 키즈 마케팅의 영역을 훨씬 벗어나 사회 운동, 정치의 영역에서도 폭넓게 사용되고 있다. 다르게 말하면 핑크는 초국가적으로 공유되는 기호학적 인프라의 일종으로서 현대 글로벌 소비 사회를 지탱하는 구조로도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필자 또한 이 구조에서 전혀 자유롭지 못하다. 2000년대 한국에서 유년기를 보낸 필는 분홍색 머리를 한 아바타 스타 슈나 세일러문을 보며 자랐고, 청소년이 된 2010년대에는 <퀸카로 살아남는 법 (Mean Girls)>나 <금발이 너무해 (Legally Blonde)> 등의 미국 하이틴 영화를 접하며 자연스럽게 핑크와 여성성의 관계를 내재화했다.

그렇기에 필자의 시선에서 블랙핑크는 단순히 케이팝 걸그룹 중 하나가 아니라 초국가적 문화의 흐름 속에서 배태된 시대의 산물로 재구성된다. 이에 더해 소녀시대, 2NE1 등의 그룹의 음악을 들으며 자란 나에게 핑크에 블랙을 더하는 전략은 청순-섹시-큐트로 요약될 수 있는 기존 걸그룹 컨셉과의 차별화이자, ‘블랙 뮤직’을 추종하는 실력파 뮤지션이라는 이미지가 강한 YG 아티스트의 계보를 이으면서도 차별성을 확보하는 행위로 해석된다.

블랙핑크와 스타벅스 굿즈 콜래보
오레오 쿠키와의 브랜드 콜래보
무라카미 다카하시의 슈퍼플랫 플라워

팬덤이 완성하는 브랜드

그렇지만 수용자의 위치성에 따라 블랙핑크를 바라보고, 분석하고, 또 좋아하는 방식은 제각각일 것이다. 필자는 수용의 차원에서 블랙핑크를 더 잘 이해하고자 2022년과 2023년에 블랙핑크의 시카고 콘서트와 서울 콘서트를 관람했는데, 시카고에서도, 서울에서도 블랙핑크의 팬들은 분홍색과 검은색이라는 암묵적인 드레스 코드에 맞추어 각자의 개성과 정체성을 표현하고 있었다.

핫핑크색 수트를 입은 팬부터 검은색 가죽 잠바와 닥터 마틴 워커로 무장한 팬까지. 그들이 모여 커다란 ‘블랙핑크’를 형성하고 있었다. 블랙핑크 그 자체가 하나의 브랜드로서 많은 사람들의 뇌리에 자리잡았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는 순간이었다.

팬들이 “뿅봉” (블랙핑크의 응원봉)을 흔들며 떼창하는 모습을 보며 필는 인류학자 크리스틴 야노의 책 <분홍빛 세계화: 헬로 키티의 태평양 횡단 이야기>에 등장하는 ‘분홍빛 세계화’ 의 중심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1974년 일본의 산리오(Sanrio)에서 출시된 이후, 헬로 키티는 단순한 캐릭터가 아니라 글로벌 라이프스타일 브랜드이자 일본을 상징하는 문화적 기호 중 하나로 자리잡았다.

크리스틴 야노는 헬로 키티의 성공이 단순히 “쿨 재팬” 정책이나 일본 캐릭터 산업의 성장 때문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헬로 키티를 자신의 정체성과 연결하고, 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과정 덕분에 가능했다고 분석한다. 헬로 키티의 대표 색상인 핑크는 귀여움과 부드러운 여성성을 상징하면서도, 소비자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지고 있다. 크리스틴 야노는 이를 ‘분홍빛 세계화’라고 부르며, 일본의 카와이 (kawaii, 귀여움) 문화가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는 현상을 설명했다.

헬로 키티의 핑크가 단순한 귀여움의 상징이 아니라, 글로벌 소비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하나의 도구가 되었듯이, 블랙핑크의 ‘핑크’ 역시 글로벌 팬덤이 공유하는 정체성의 일부가 되었다. 특히, 헬로 키티의 입이 없는 디자인 덕분에 소비자들이 각자의 감정을 투영하고 의미를 덧입힐 수 있었던 것처럼, 블랙핑크 역시 브랜드의 정체성을 유연하게 유지하면서 팬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핑크’를 해석하고 소비할 수 있도록 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핑크라는 기호가 단순한 브랜드 색상을 넘어, 문화적 자본으로 변환되는 과정이라는 해석도 가능하다고 보여진다.

이해와 용서

색깔에는 이질적인 물건도 하나의 카테고리로 묶어주는 속성이 있다. 블랙핑크는 H&M의 옷, 오레오 쿠키, 스타벅스 굿즈, 그리고 최근에는 무라카미 다카하시의 슈퍼플랫 플라워까지 블랙과 핑크로 물들이며 ‘블랙핑크’라는 거대한 브랜드를 더욱 확장시키고 있다. 우리가 블랙핑크를 이해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다.

결국 블랙핑크를 이해한다는 것은 YG 엔터테인먼트가 고수해온 음악적, 미학적인 틀과 비즈니스 전략 및 케이팝 산업에서 색깔을 브랜딩에 활용해 온 방식에 대한 중간 (meso)수준에서의 분석, ‘블랙’과 ‘핑크’라는 기호가 현대 소비 사회와 대중 음악 산업 속에서 글로컬(glocal)한 상징으로서 가지는 사회문화적 의미에 대한 거시적인 분석, 그리고 블랙핑크가 팬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소비되고 재구성되는지에 대한 미시적인 분석 모두를 요하는 작업일 것이다. 그리고 케이팝 산업의 범주에서 벗어나 애니메이션의 영역에서 “분홍빛 세계화”를 이끌고 있는 <핑크퐁>이나 <캐치! 티니핑 >등과도 연결해 보며, 블랙핑크를 계속해서 낯설게 보는 작업이 필요하다.

한나 아렌트는 이해하는 것과 용서하는 것은 다르다고 말했다. 걸그룹의 생산과 소비에 대해 건설적으로 비판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그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앞으로 걸그룹에 대한 새로운 담론의 장이 열리기를 기대하며, 이 글이 그 실마리를 조금이나마 제공했기를 바란다.(끝)

작성일: 2025년 2월 23일

BLACKPINK — ‘Shut Down’ M/V

글쓴이 이소윤은 듀크 대학교 정치학 학사, 시카고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를 거쳐 현재 시카고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5년부터 미국에서 유학하며 한류의 성장을 관찰해 왔고, 케이팝 산업 속 직업 교육과 일 경험에 대한 박사 논문 연구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