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프랑켄슈타인: 신화에서 천민자본주의까지..창조주의 책임과 괴물 만들기에 관한 이야기

홍지영 | 남네바다 주립대학교(CSN) 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I. 신화와 성경이 만나는 자리에서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을 보며 나는 계속해서 겹쳐지는 이미지들을 발견했다. 그리스 신화의 비극적 영웅들, 성경 속 타락과 구원의 서사—이 모든 것이 크리쳐라는 한 존재 안에 응축되어 있었다.

오이디푸스의 그림자

빅터 프랑켄슈타인을 보면서 오이디푸스가 떠올랐다. 엄마에 대한 지나친 애착, 적대적인 아버지와의 관계. 빅터는 죽은 엄마를 되살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혀 생명을 창조한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만든 생명은 그를 파멸로 이끈다. 오이디푸스가 운명을 피하려다 오히려 운명을 완성했듯이, 빅터는 죽음을 극복하려다 더 큰 죽음을 초래한다.

프로메테우스의 저주

크리쳐의 탄생 장면은 프로메테우스 신화 그 자체다. 인간에게 불을 준 프로메테우스는 신들의 분노를 사 영원히 죽지 못하고 독수리에게 간을 쪼아 먹히는 벌을 받는다. 빅터 역시 생명이라는 '불'을 창조했고, 그 대가로 평생 크리쳐에게 쫓기며 고통받는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크리쳐 자신도 프로메테우스라는 점이다. 그는 창조되었지만 죽을 수도 없고, 받아들여지지도 못한다. 영원한 고통 속에서 살아가야 하는 존재. 불과 번개로 탄생한 그는 프로메테우스의 불이자, 그 불이 가져온 저주 그 자체다.

메두사의 비극

크리쳐를 보며 나는 메두사를 떠올렸다. 포세이돈에게 겁탈당했지만, 신녀라는 이유로 신들에게 미움을 받아 머리카락이 뱀으로 변하고 괴물이 된 메두사. 그녀는 피해자였지만 괴물로 낙인찍혔다.

크리쳐도 마찬가지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창조되었고, 그 흉측한 외모 때문에 세상으로부터 거부당한다. 순수를 알아보는 이에게는 아름답지만, 내면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적이 된다. 영화에서 범죄를 크리쳐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면은 메두사가 괴물로 낙인찍히는 과정과 너무나 닮아 있다.

실낙원: 아담과 이브, 그리고 사탄

크리쳐는 영화 속에서 밀턴의 『실낙원』을 읽는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다. 크리쳐는 동시에 아담이자 사탄이다. 아담처럼 그는 창조주에 의해 만들어졌고, 동반자를 갈구한다. "나에게도 이브를 만들어 달라"고 애원하는 그의 모습은 에덴동산의 아담과 겹친다. 하지만 빅터는 그 요청을 거부한다. 신은 아담에게 이브를 주었지만, 빅터는 크리쳐에게 동반자조차 허락하지 않는다.

동시에 크리쳐는 사탄이기도 하다. 낙원에서 쫓겨난 사탄처럼, 크리쳐는 세상으로부터 추방당한다. 사탄이 하나님을 향한 분노로 인간을 타락시켰듯이, 크리쳐는 빅터를 향한 복수로 그의 가족을 파괴한다. 하지만 밀턴의 사탄이 "차라리 지옥에서 왕 노릇을 할지언정 천국에서 섬기지는 않겠다"고 외쳤다면, 크리쳐는 "나는 천국도 지옥도 원하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여지고 싶을 뿐"이라고 울부짖는다.

십자가 위의 예수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는 크리쳐에게서 예수를 보았다. 그가 생명을 받는 순간,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모습과 너무나 닮아 있었다. 계속해서 고난 속에 살아야 했으며,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한다. 마음만 먹으면 어렵지 않게 많은 사람들을 구해줄 수도 있다. 순수를 알아보는 이에게는 누구보다도 아름답지만, 내면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두려움의 대상이고 적이 된다.

마지막 장면에서 빅터가 "아들아, 살아가라"고 말할 때, 나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하소서"라고 말한 예수를 떠올렸다. 크리쳐는 자신을 창조하고 버린 아버지를 용서한다. 빅터는 자신이 만든 괴물 같은 아들을 인정한다.

II. 델 토로 감독이 말하는 창조의 의미

이 신화와 성경의 이미지들이 우연히 겹쳐진 것은 아니다. 델 토로 감독은 의도적으로, 집요하게,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를 탐구해왔다. 그의 시각으로 들어가 보자.

나는 왜 계속 '아버지'를 이야기하는가

『피노키오』에서 나는 제페토를 그렸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가 나무 인형을 만들고, 그 인형이 살아 움직이자 당황한다. 준비되지 않은 아버지. 슬픔에 갇힌 창조주. 그리고 사랑받고 싶은 아들. 『프랑켄슈타인』에서 나는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다. 다만 이번엔 더 잔혹하게, 더 솔직하게.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나약한 창조주다. 그는 미친 듯이 생명을 창조하지만, 그 생명이 자신의 기대와 다르자 거부한다. 아니, 그에게 무슨 기대가 있었는지조차 모호하다. 엄마의 죽음에서 비롯된 집착, 아버지의 냉대에서 생긴 분노—그것들이 뒤섞여 만들어낸 것이 크리쳐다. 그는 아버지가 될 준비가 되지 않은 자였다. 아니, 창조주가 될 자격이 없었다.

나는 크리쳐를 만들 때 의도적으로 예수의 이미지를 넣었다. 십자가에 달린 듯한 그의 탄생, 끝없는 고난,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하는 모습. 순수를 알아보는 이에게는 아름답지만, 내면을 보지 못하는 이에게는 괴물인 존재. 이것이 피조물의 운명이다.

하지만 동시에 나는 이렇게 묻고 싶었다: 빅터 프랑켄슈타인 = 크리쳐가 아닌가?

괴물은 누구인가. 그의 동생은 죽어가며 말한다. "형, 너야말로 괴물이야." 맞다. 빅터는 자신의 내면에 괴물을 품고 있었고, 그것을 외부로 투사했을 뿐이다. 누구나 철부지처럼 자신의 욕망에 의해 내면에 괴물을 탄생시키지만, 이것을 수습할 능력은 없다.

눈먼 노파가 크리쳐에게 말한다.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지혜다. 해를 당했어도, 누가 해를 끼쳤는지 알면서도 흘려보내는 것이 인생의 지혜다." 크리쳐는 답한다. "기억할 수 없는 걸 잊을 수는 없어."

이것이 핵심이다. 크리쳐는 자신을 창조한 자가 누구인지, 왜 자신이 태어났는지조차 모른다. 그런데 어떻게 용서할 수 있겠는가? 빅터 역시 자신이 왜 이 괴물을 만들었는지,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른다.

색과 상징으로 말하다

나는 색으로 이 관계를 표현했다. 빨강—빅터의 엄마가 입었던 드레스, 빅터의 장갑과 스카프, 엘리자베스의 웨딩드레스. 이 모든 빨강은 욕망이자 상실이고, 사랑이자 폭력이다. 겨울과 눈은 고통과 순수함을 동시에 담는다. 그로테스크한 성과 구조물, 불과 번개—이것들은 책에서는 보여줄 수 없는 시각적 언어다.

마지막 장면에서 빅터와 크리쳐는 화해한다. 빅터는 죽어가며 말한다. "아들아... 살아가라." 크리쳐는 자신의 동반자를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지만, 빅터는 거절한다. 대신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너를 괴물로서 수용하며 살아가라."

이것이 인간의 일생이다. 욕망—내면의 갈등—수용.

우리는 모두 준비되지 않은 채로 무언가를 창조한다. 자식일 수도 있고, 예술일 수도 있고, AI일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기대와 다를 때, 우리는 거부한다. 도망친다. 하지만 결국 우리는 그것과 화해해야 한다. 우리가 만든 괴물을 '인정'하고, 우리를 버린 창조주를 '용서'해야 한다.

나는 『피노키오』에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고, 『프랑켄슈타인』에서 완성했다. 아버지와 아들. 창조주와 피조물. 신과 인간. 그리고 우리 안의 괴물.

AI 시대의 신화

델 토로가 이 영화에서 신화와 성경을 끌어들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 고대의 이야기들은 인간이 창조의 영역에 도전할 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를 보여준다.

AI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프랑켄슈타인은 단순한 괴물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창조한 것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창조물에게 어떤 책임을 질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프로메테우스처럼 우리는 AI라는 불을 얻었다. 하지만 그 불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메두사처럼 우리가 만든 것을 괴물로 낙인찍을 것인가? 아담에게 이브를 주었던 신처럼, 우리는 창조물에게 동반자와 공동체를 허락할 것인가?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은 신화와 성경을 통해 이 질문들을 던진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은 답을 제시한다: 인정과 용서.

창조주는 피조물을 인정해야 하고, 피조물은 불완전한 창조주를 용서해야 한다.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넘어서고, 프로메테우스의 저주를 끝내고, 메두사를 구원하고, 실낙원을 회복하는 유일한 길이다.

Frankenstein by Guillermo del Toro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출처: 넷플릭스
영화 <프랑켄슈타인> 스틸컷. 출처: 넷플릭스

III. 누가 프랑켄슈타인인가?

영화를 본 후 나는 델 토로가 던진 질문들을 곱씹었다. 창조주의 책임, 괴물 만들기, 인정과 용서. 그런데 이 모든 것이 추상적인 철학의 영역에만 머물러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2025년 대한민국의 일상 속에서, 우리는 매일 프랑켄슈타인이 되고 있다.

어린이집 단톡방의 충격

최근 지인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수도권 아파트 단지 내 어린이집에서 학부모 단톡방이 '자가방'과 '전월세방'으로 나뉘어 있다는 것이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같은 어린이집에 아이를 보내는 부모들이, 집을 소유했느냐 빌려 사느냐로 서로를 구분하고 있다.

기예르모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을 보고 나서 이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누가 진짜 프랑켄슈타인인가?

창조주의 책임 방기

영화 속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창조하는 데만 집착했지, 그 이후를 생각하지 않았다. 크리쳐가 자신의 기대와 다르자 그는 도망쳤다. 책임을 회피했다. 그리고 크리쳐를 괴물로 만든 것은 빅터 자신이었다.

2025년 대한민국의 부모들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우리는 아이들을 낳아 기르지만, 정작 어떤 인간으로 키울 것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한다 해도 그것은 "남들보다 우위에 서는 인간"일 뿐이다.

자가 부모들이 전월세 아이들과 놀지 말라고 가르치는 순간, 우리는 무엇을 창조하는가? 공감 능력이 결여된 괴물을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급을 나누는 사회, 괴물을 양산하는 시스템

영화에서 크리쳐는 농가에 숨어 눈먼 노파와 교류한다. 노파는 그의 외모를 볼 수 없기에 그의 순수함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눈을 가진 사람들은 그를 괴물로 취급했다.

어린이집 단톡방을 자가와 전월세로 나누는 부모들은 무엇을 '보고' 있는가? 아이의 순수함인가, 아니면 부모의 재산인가?

델 토로는 영화에서 범죄를 크리쳐에게 뒤집어씌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나는 그 장면이 무서웠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 사회의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전월세에 사는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역시 그런 집 아이"라고 말하고, 자가에 사는 아이가 문제를 일으키면 "아이가 그럴 수도 있지"라고 넘어간다. 우리는 계속해서 약자에게 낙인을 찍고, 그들을 괴물로 만든다.

천민자본주의가 만든 프랑켄슈타인

"천박하다"는 표현이 이보다 더 적절할 수 없다. 자본주의는 경쟁을 부추기지만, 천민자본주의는 인간의 존엄성마저 거래한다.

산후조리원 동기 모임, 특정 학원 동기 모임으로 패거리를 만들고, 그것을 자녀들에게 세습시키는 부모들. 그들은 빅터 프랑켄슈타인과 다를 바 없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무언가를 창조하지만,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는 생각하지 않는다.

빅터가 크리쳐를 만들고 책임지지 않았듯이, 이 부모들은 아이들을 낳고 기르지만 정작 어떤 사회를 만들고 있는지는 외면한다.

메두사의 비극이 반복되다

그리스 신화에서 메두사는 포세이돈에게 겁탈당한 피해자였지만, 괴물로 낙인찍혔다. 전월세에 사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부모의 경제적 능력이라는, 자신이 선택할 수 없었던 조건 때문에 차별받는다.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피하려다 오히려 운명을 완성했다. 자가 부모들은 아이를 "더 나은 환경"에서 키우려다 오히려 공감 능력 없는 괴물로 만들고 있다. 그들이 피하려는 것—인간성의 상실—을 정확히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프로메테우스의 불, 현대판 저주

프로메테우스는 인간에게 불을 주었고, 그 대가로 영원히 고통받았다. 현대의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무엇을 주고 있는가? 경쟁의 불, 차별의 불, 혐오의 불을 주고 있다.

델 토로가 AI 시대에 『프랑켄슈타인』을 만든 이유를 나는 이제 안다. AI를 만들 때와 마찬가지로, 아이를 키울 때도 우리는 묻지 않는다. "이것을 창조한 후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영화에서 빅터는 크리쳐의 탄생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이후를 몰랐다고 고백한다. 현대의 부모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는 것에만 관심이 있지, 그 아이가 어떤 인간이 될지는 관심 없다.

실낙원: 동반자를 거부당한 아이들

크리쳐는 빅터에게 애원한다. "나에게도 동반자를 만들어 달라." 하지만 빅터는 거절한다. 전월세에 사는 아이들도 동반자를 원한다. 같은 어린이집에 다니는 친구들과 놀고 싶어 한다. 하지만 자가 부모들은 그것을 거부한다.

밀턴의 『실낙원』에서 사탄은 "차라리 지옥에서 왕 노릇을 할지언정 천국에서 섬기지는 않겠다"고 외쳤다. 하지만 크리쳐는, 그리고 전월세에 사는 아이들은 이렇게 울부짖는다. "나는 왕이 되고 싶지 않다. 그저 친구가 되고 싶을 뿐이다."

십자가 위의 아이들

델 토로는 크리쳐를 십자가에 달린 예수의 이미지로 만들었다. 죄 없이 고통받고, 용서할 수 없는 자를 용서한다.

전월세에 사는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신이 선택하지 않은 조건 때문에 십자가에 매달린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아이들은 여전히 친구가 되고 싶어 한다. 차별하는 아이들을 용서하고 싶어 한다.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고통받는 아이들인가, 아니면 그 고통을 만드는 어른들인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빅터의 동생은 죽어가며 말한다. "형, 너야말로 괴물이야."

맞다. 괴물은 크리쳐가 아니었다. 괴물은 크리쳐를 만들고 버린 빅터였다.

2025년 대한민국에서 괴물은 누구인가?

전월세에 사는 아이들인가? 아니다. 괴물은 자가와 전월세를 나누는 단톡방을 만드는 부모들이다. 괴물은 아이들에게 "재력으로 사람을 판단하라"고 가르치는 어른들이다. 괴물은 이 천박한 시스템을 묵인하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우리 모두다.

IV. 인정과 용서: 우리가 선택해야 할 길

마지막 장면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빅터는 죽어가며 크리쳐에게 말한다. "아들아... 살아가라." 크리쳐는 동반자를 만들어 달라고 애원했지만, 빅터는 다른 답을 준다. "너를 괴물로서 수용하며 살아가라."

이것은 포기가 아니다. 이것은 인정이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전월세에 사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가로 이사 가는 것이 아니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가 부모들에게 필요한 것은 자신들이 만든 괴물—차별하는 아이들, 공감 능력 없는 아이들—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창조물임을 인정하고, 책임지는 것이다.

천민자본주의 시대의 답

어떤 분이 조언했다. "소수 천박한 학부모의 일탈이니 무시하라"고. 하지만 나는 묻고 싶다. 정말 소수인가? 산후조리원 동기 모임, 특정 학원 동기 모임, 자가와 전월세를 나누는 단톡방—이것들이 정말 소수의 일탈인가? 아니다. 이것은 시스템이다. 우리가 함께 만든, 천민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프랑켄슈타인이다.

델 토로가 영화에서 보여준 것처럼, 괴물은 태어날 때부터 괴물이 아니다. 괴물은 만들어진다. 거부당하고, 차별받고, 낙인찍히면서 괴물이 된다. 우리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태어날 때는 모두 순수하다. 하지만 "자가 애들이랑만 놀아라", "전월세 애들은 급이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괴물이 된다.

질문으로 돌아가다

누가 프랑켄슈타인인가? 빅터 프랑켄슈타인은 생명을 창조하고 책임지지 않은 자였다. 2025년 대한민국의 프랑켄슈타인은 누구인가? 차별하는 시스템을 만들고 유지하는 우리 모두다. 아파트 단톡방을 나누는 부모들, 그것을 묵인하는 어린이집, 이 뉴스를 보고도 "남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우리 모두가 프랑켄슈타인이다.

델 토로의 영화가 끝날 때, 빅터와 크리쳐는 화해한다. 빅터는 크리쳐를 인정하고, 크리쳐는 빅터를 용서한다. 우리 사회도 화해할 수 있을까? 자가 부모들이 전월세 아이들을 인정하고, 전월세 부모들이 이 천박한 시스템을 만든 사회를 용서할 수 있을까?

아니,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괴물—차별하고, 혐오하고, 급을 나누는 아이들—을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그리고 그 괴물을 만든 것이 우리 자신임을 인정할 용기가 있는가?

에필로그: 눈먼 노파의 지혜

영화에서 눈먼 노파는 크리쳐에게 말한다. "용서와 화해가 진정한 지혜다."

크리쳐는 답한다. "기억할 수 없는 걸 잊을 수는 없어."

전월세에 사는 아이들은 기억할 것이다. 어린이집 단톡방에서 배제당했던 경험을, 자가 부모들의 차가운 눈빛을, "너희는 다르다"는 무언의 메시지를.

하지만 그들에게도 선택권은 있다. 그 기억을 원한으로 키울 것인가, 아니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동력으로 삼을 것인가.

자가에 사는 아이들도 기억할 것이다. 부모들이 가르친 차별을, 급을 나누는 법을, 돈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법을.

하지만 그들에게도 선택권은 있다. 그 가르침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거부할 것인가.

델 토로의 『프랑켄슈타인』이 위대한 이유는 답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이다. 대신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천민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우리는 어떤 사회를 만들 것인가?"

프랑켄슈타인이 될 것인가, 아니면 눈먼 노파처럼 외모가 아닌 내면을 볼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인가. 선택은 우리의 몫이다.

신화 속 오이디푸스는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프로메테우스는 영원히 고통받았다. 메두사는 괴물로 죽었다. 사탄은 낙원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크리쳐는 달랐다. 그는 용서를 선택했다. 빅터는 인정을 선택했다.

우리도 선택할 수 있다. 오이디푸스의 비극을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이야기를 쓸 것인가. 프로메테우스의 저주 속에 갇혀 있을 것인가, 아니면 자유를 선택할 것인가.메두사를 계속 괴물로 만들 것인가, 아니면 그녀의 진실을 볼 것인가. 실낙원에 머물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낙원을 만들 것인가. 2025년 대한민국에서, 우리 각자가 빅터이자 크리쳐다.

우리는 창조주이자 피조물이다. 우리는 가해자이자 피해자다. 우리는 괴물이자 인간이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선택할 힘이 있다.

인정과 용서.

델 토로가 『피노키오』에서 시작하고 『프랑켄슈타인』에서 완성한 그 메시지가, 지금 여기 2025년 대한민국의 어린이집 단톡방에서도 유효하다. 아니,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그 메시지가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순간인지도 모른다.(끝)


작성일: 2025년 11월 15일

필자 홍지영(Amy Hutchinson)은 남네바다 주립대학교(CSN) 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로서, 네바다주립대학교(UNLV)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학문적 연구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융합한 독창적인 방법론을 통해, 한국인들의 초국가적 정체성과 문화적 통합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