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크리스마스에 빛나는 두 여성 ― 2005년에서 2025년까지, 싱글 여성의 시간

홍지영 | 남네바다 주립대학교(CSN) 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김삼순, 크리스마스이브

스물여덟 살의 크리스마스이브, 삼순은 변장을 하고 호텔에 잠입한다. 애인 민현우의 외도를 확인하기 위해서다. 룸서비스를 가장해 들어간 방에서 그녀는 현우와 다른 여자를 목격한다. 전직 농구선수답게 당장이라도 그를 때려주고 싶었지만, 결국 삼순이 할 수 있었던 건 문 밖에서 비참하게 기다리다 커피숍에서 눈물을 쏟는 일이었다. 크리스마스이브라는 가장 로맨틱해야 할 밤은 그렇게 최악의 기억으로 남는다.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우는 그녀를 낯선 남자 현진헌이 냉소적으로 바라본다.

“크리스마스 특별 쇼인가 보네요.”

이 한마디로 두 사람은 최악의 크리스마스에 최악의 첫 만남을 갖는다.

“뭡니까? 아줌마. 변태예요?”

김삼순에게 이 크리스마스는 말 그대로 모든 면에서 최악이었다.

브리짓의 크리스마스 파티

브리짓 존스 역시 부모님의 크리스마스 파티에서 마크 다아시와 최악의 첫 만남을 갖는다. 루돌프 무늬의 어글리 스웨터를 입은 마크는 지나치게 무뚝뚝하고 어색해 보이고, 브리짓은 그를 단번에 “오만하고 재수 없는 남자”로 규정한다. 따뜻해야 할 가족 파티는 오히려 서로의 결점을 확대하는 불편한 공간이 된다.

두 작품 모두 크리스마스라는 로맨틱한 시즌을 배경으로 하지만, 주인공들이 마주하는 것은 화려한 사랑이 아니라 현실의 차가운 벽이다. 2005년 한국을 뜨겁게 달궜던 <내 이름은 김삼순>은 방영 초기부터 “한국판 <브리짓 존스의 일기>”로 불렸다.

남산 포장마차에서 혼자 참이슬과 우동, 김밥, 꼼장어, 계란말이를 먹어치우는 삼순의 모습은 당시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는 노처녀”의 상징처럼 소비되었다. 일 마치고 집에 와 늘어난 티셔츠를 입은 채 양푼비빔밥에 소주를 마시는 장면을 두고 사람들은 “쓸쓸하게 나이 들어가는 노처녀”라며 비웃었다.

2005년의 크리스마스는 커플만의 축제였다. 싱글이라는 정체성은 곧 실패와 외로움의 다른 이름이었고, 특히 30대를 앞둔 여성에게 크리스마스는 “결혼하지 못한 인생”을 적나라하게 상기시키는 잔인한 날이었다.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크리스마스 파티 — 어색함마저 사랑스러웠던 밤.
못생긴 스웨터와 와인 한 잔, 그게 바로 브리짓식 크리스마스.

평범함의 반격

두 작품이 당대에 혁명적으로 받아들여진 이유는 로맨틱 코미디의 전형을 그대로 차용하면서도, 그 공식을 안에서부터 뒤집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인 로맨틱 코미디라면 날씬하고 아름다운 여주인공, 결함 없는 재벌 남자 주인공, 우연처럼 가장된 운명적 만남, 그리고 신데렐라식 해피엔딩이 필수 요소였다. 사랑은 늘 외모와 조건이 보장된 세계에서만 성립하는 것처럼 그려졌다.

그러나 김삼순과 브리짓은 그 공식에서 의도적으로 비켜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통통한 체형의 평범한 외모를 지녔고, 폭식과 다이어트를 반복하며 실패하는 모습을 숨기지 않는다. 서른을 앞둔 ‘노처녀’라는 사회적 낙인을 안고 있으며, 일과 사랑 사이에서 늘 현실적인 선택을 강요받는다. 이들의 평범함은 웃음의 대상이 아니라, 기존 로맨스 서사에 균열을 내는 출발점이 된다.

브리짓 존스를 향한 일부 남성 관객의 반응은 노골적이었다.
“브리짓처럼 매력적이지 않은 여자 때문에 두 남자가 싸운다는 설정은 말이 안 된다.”
르네 젤위거가 충분히 매력적인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할리우드식 미의 기준에 완벽히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비판이 쏟아졌다.

이는 여성 캐릭터에게 요구되는 이중 잣대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남자 주인공은 평범해도 괜찮지만, 여자 주인공은 반드시 ‘완벽한 외모’를 갖춰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통념이다. 김삼순 역시 파리 최고 제빵학교 출신의 실력파 파티시에였지만, 사회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능력이 아니라 “29세, 미혼, 통통한 체형”이라는 표식뿐이었다.

주체적 여성

맞선 자리를 망친 진헌에게 삼순이 던진 이 대사는 드라마의 핵심을 압축한다.

“당신은 누구한테 거절당해본 적 있어요?
누구 앞에서 한없이 작아진 적 있어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할 확률이 얼마나 될 것 같아요?
당신 같은 사람한텐 흔한 일이겠지만 난 아녜요.”

이 대사는 사랑의 불안이 계급과 외모, 조건에 따라 얼마나 다르게 작동하는지를 날카롭게 드러낸다.

브리짓 역시 일기를 통해 자신의 불완전함을 기록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줄 사람을 찾아 나선다. 두 주인공은 상처받지만 무너지지 않는다. 이들은 감정에 솔직하고, 필요하다면 남자에게 먼저 주먹을 날릴 줄도 아는 여성들이다.

“서른이면 노처녀”: 2005년의 사회

2005년 한 조사에 따르면 한국 여성의 73%가 스스로를 “뚱뚱하다”고 인식했다. 이 수치는 단순한 체형 인식의 문제가 아니다. 실제 몸과 무관하게 여성 열 명 중 일곱 명이 자신을 부족하고 결핍된 존재로 느끼도록 만드는 사회적 압박이 광범위하게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외모는 개인의 특성이 아니라, 끊임없이 평가되고 비교되는 사회적 기준이었다.

드라마 속 김삼순은 자신을 “스물아홉의 뚱뚱한 노처녀”라고 소개한다. 이 자기 규정은 과장이 아니었고, 많은 시청자들은 그 설정에 즉각적으로 공감했다. 한 시청자의 회상은 당시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전한다.
“92년에 31살로 뉴욕 유학 갔는데, 다들 20대 초반 여자들한테 잘 보이려고 하더라. 30 넘으면 완전 노처녀 취급이었다.”

당시에는 스물다섯만 넘어도 친척들이 “과년한 딸 두고 잠이 오냐”며 부모를 압박하던 시대였다. 결혼은 개인의 선택이 아니라 가족 전체의 체면과 직결된 문제였고, 여성의 나이는 관리 대상이자 통제의 근거였다. 그 과정은 자연스럽게 여겨졌지만, 지금에 와서 보면 분명한 형태의 구조적 폭력이었다.

쉽게 변한 기준

불과 5~7년 사이, 한국 사회의 결혼 인식은 눈에 띄게 바뀌었다.
“98년에 28살 신부가 늙어 보인다고 뒷말이 나왔는데, 2003년에 와보니 여자 30 결혼이 보통이 돼 있더라.”
이 짧은 증언은 여성의 나이를 재는 기준이 얼마나 빠르고 자의적으로 이동하는지를 보여준다.

이는 ‘노처녀’라는 개념이 생물학적 사실이 아니라, 시대와 분위기에 따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사회적 산물임을 분명히 드러낸다. 28세가 ‘늙은 신부’에서 ‘평범한 결혼 연령’으로 바뀌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5년이었다. <내 이름은 김삼순>은 이미 사라지고 있던 시대의 감각을 포착했기 때문에, 오히려 당시 30대 여성들에게 더 큰 분노와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다.

20년이 지난 지금, 시청자들은 김삼순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바라본다.
“지금 기준으로 보면 삼순이는 꽃다운 나이고, 전혀 뚱뚱하지도 않다. 키 크고, 실력 있고, 빠지는 게 없다.”
과거의 낙인은 현재의 기준으로는 더 이상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

그러나 정말 모든 것이 바뀌었을까. ‘노처녀’라는 단어는 사라졌지만, 여성의 나이와 외모, 결혼 여부를 재단하는 시선 자체는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단지 기준선이 25에서 30으로, 다시 30에서 35로 이동했을 뿐이다. 평가의 방식은 달라지지 않았고, 판단의 대상만 조금 늦춰졌을 뿐이다.

내 이름은 김삼순 — 사랑보다 ‘나로 사는 법’을 먼저 가르쳐준 이야기.
연애 드라마의 외피를 쓴, 한 여자의 자존과 생존에 대한 기록.

다시 보는 김삼순

한 트윗은 이렇게 말한다.
“실력 있는 파티시에가 혼술한다고 왜 웃겼을까. 다시 보니 삼순은 정말 멋진 캐릭터였다.”

고졸 출신으로 홀로 파리 르 꼬르동 블루에 유학을 다녀온 여성. 이는 단순한 설정이 아니라, 냉정히 말해 누구에게나 허락되지 않는 성취다. 언어, 자본, 계급의 장벽을 스스로 넘은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사회가 그녀에게서 본 것은 그런 능력이나 노력의 궤적이 아니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29세, 미혼, 통통한 체형”이라는 세 개의 낙인에 머물렀다.

그래서 김삼순은 늘 설명해야 했고, 변명해야 했으며, 웃음의 대상이 되었다. 능력은 배경으로 밀려났고, 외모와 나이는 전면에 놓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드라마의 진짜 주인공은 처음부터 끝까지 삼순이었다. 백마 탄 왕자가 그녀를 구원한 것이 아니라, 그녀가 자신의 삶을 쟁취하며 미성숙한 남자까지 변화시키는 이야기였다. 문제는 그때 우리가 이 서사를 제대로 읽지 못했다는 점이다.

웃음 뒤에 남겨진 편견

브리짓 존스의 일기는 종종 ‘치크 플릭’이라는 말로 평가절하됐다. “치크 플릭(chick flick)”은 여성을 주 관객층으로 상정한 로맨스·멜로·코미디 영화/드라마를 가리키는 세속적 표현이다. 남성 중심 코미디는 보편적 이야기로, 여성 중심 이야기는 특수한 이야기로 분류되는 구조적 차별 때문이다.

물론 비판도 가능하다. “관계가 모든 걸 더 좋게 만든다”는 메시지는 위험하다. 그러나 시리즈가 이어지며 브리짓은 나이 든 여성의 현실을 끊임없이 갱신해왔다.

2025년작 <브리짓 존스: 뉴 챕터>는 50대 싱글맘 브리짓을 그린다. 남편의 죽음, 양육, 다시 시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고민. 삶은 계속되고, 사랑의 형태도 달라진다.

초콜릿과 시루떡

<내 이름은 김삼순>의 기획 의도는 “초콜릿처럼 식감이 풍부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실연은 초콜릿으로 치유되고, 달콤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은 사랑의 복잡한 감정을 대신한다. 동시에 드라마는 삼순이네 방앗간의 시루떡을 통해 또 다른 사랑을 보여준다. 케이크가 연인 간의 사랑을 상징한다면, 시루떡은 가족과 일상, 그리고 쉽게 무너지지 않는 삶의 기반을 의미한다. 로맨스는 흔들릴 수 있지만, 삶을 지탱하는 사랑은 늘 그 자리에 남아 있다는 메시지다.

이제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비참함이나 결핍의 상징이 아니다. 누군가와 함께하지 않는다고 해서 자신의 삶이 실패처럼 느껴져야 할 이유도 없다. 많은 싱글들은 이날을 관계의 증명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허락된 휴식의 시간으로 보낸다. 혼자 영화관에 가고, 전시를 보고, 조용히 한 해를 정리하는 일은 더 이상 설명이나 변명이 필요 없는 일상이 되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삼순이의 포장마차 장면 역시 전혀 다르게 읽힌다. 2005년에는 “쓸쓸한 노처녀”의 이미지로 소비되었던 장면은, 이제 자율과 선택의 상징으로 재해석된다. 혼자 술을 마시고 혼자 식사를 하는 모습은 비참함이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기 삶의 리듬을 지키는 태도에 가깝다. 크리스마스는 이제 사랑의 유무를 증명하는 날이 아니라, 각자의 삶이 존중받는 날이 되었다.

멈춘 이야기, 필요한 진화

브리짓은 나이 들었지만, 삼순은 여전히 2005년에 멈춰 있다.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를 생각하면, 우리에게도 진화하는 삼순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40대의 삼순, 50대의 삼순. 결혼 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커리어를 완성하고, 후배를 키우고, 여전히 시루떡과 케이크를 만드는 여성.

20년 전 이 드라마는 위로였다. 이제는 그 다음 이야기가 필요하다. 완벽하지 않아도, 날씬하지 않아도, 서른을 넘어도, 마흔을 넘어도, 오십을 넘어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말해주는 이야기.

시대는 변했다.
이제 김삼순도 함께 진화할 때다.
2026년의 김삼순을, 우리는 만나고 싶다.(끝)


홍지영 박사는 남네바다 주립대학교(CSN)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다. 네바다주립대학교(UNLV)에서 교육학 박사학위를 취득했으며, 2025년 에미상(EMMY) 후보 및 『Who’s Who in American Education』에 등재되었다. 학문적 연구와 다큐멘터리 제작을 융합한 독창적인 방법론을 통해, 한국인들의 초국가적 정체성과 문화적 통합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다큐멘터리와 학술 연구를 연계한 대표적인 작업으로는 “베이스볼 하모니”(2024)와 연계 논문 "한국전쟁 혼혈인 김영도의 생애사 연구"(2024), 다큐멘터리 “One Korean but Two Koreas”(2023)와 연계 논문 “Collaborative Witnessing: A North Korean’s Immigration Experience in South Korea”(2021)가 있다. 이를 통해 영상 매체와 학술 연구의 통합적 접근을 실현한다. 또한, 최근 블랙코미디 영화 “마인드풀 소울”을 완성하며 창작의 폭을 넓히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