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실패' 역시도 중요한 우리의 문화적 코드: K웹툰 '무직백수 계백순'의 발칙함
하 지 수 | 위드온 뉴스
"통장 잔고 만원, 스펙은 평범, 스물여섯 살의 백수."
웹툰 '무직백수 계백순'은 많은 2030 독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 취업난과 불확실한 미래에 지친 청년들의 현실을 귀여운 캐릭터와 독특한 설정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취업난과 불확실한 미래에 지친 청년들의 현실을 독특한 "TS(Trans Sexual)화 전략"과 귀여운 캐릭터로 승화시킨 이 작품의 인기는 단순한 웹툰의 성공을 넘어선다. 열악한 근무환경과 상사의 괴롭힘으로 퇴사를 선택하고, 웹소설 작가의 도전마저 연이은 공모전 탈락으로 좌절을 맛본 주인공의 이야기는, 최근 심각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고립 및 은둔 청년' 문제와 맞닿아 있다.
2023년 첫 실태조사에서 드러난 54만 명의 고립·은둔 청년들처럼, 사회와 단절된 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는 주인공의 모습은 현실의 반영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러한 무거운 현실을 새로운 미학으로 승화시킨다. 실패는 더 이상 부끄럽게 감춰야 할 것이 아닌,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재해석되고 있다. 이는 현대 청년 문화의 중요한 전환점을 보여준다.
실험적 서사의 장
‘무직백수 계백순’에서는 주인공인 계백순이 산더미같이 쌓인 설거지가 있는 지저분한 방에서 하루종일 컴퓨터 게임을 하거나, 일명 ‘뽀글이’, 즉 라면봉지에 그대로 물을 부어 끼니를 해결하고, 누워서 유튜브를 보다 잠을 자는 일상이 있는 그대로 그려진다.
계백순은 RPG게임을 하며 아이템을 팔아 생계유지를 하고, 푼돈 200원으로 하루를 버틴다. 다음화를 위한 흥미진진한 떡밥을 배치해 놓는 일반적인 웹툰의 성격과는 다르게 늘상 끝이 다소 허무한, 반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계백순의 ‘일상툰’에 가깝다.
웹툰 작가 '지발'의 성별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독자들 사이에서는 특유의 캐릭터 묘사 방식을 두고 의미 있는 해석들이 오갔다. 첫 화에서는 계백순의 캐릭터가 여성으로 설정되었지만 남성과 비슷하다, 혹은 작가가 남자일 것 같다는 추측의 댓글이 주로 달렸다. 이러한 독특한 캐릭터 설정은 작품이 "TS(Trans Sexual)화 전략"을 활용하고 있다는 분석으로 이어졌다.
작품의 TS(Trans Sexual)화 전략은 캐릭터가 남성에서 여성으로, 혹은 여성에서 남성으로의 성 전환을 활용하는 것을 뜻한다. 일반적으로 TS는 남성에서 여성으로 성전환되는 것을 지칭하는 말이다. ‘무직백수 계백순’의 경우, 명시적으로 남성에서 여성으로 캐릭터의 성별이 바뀌었다는 설명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특징적인 부분을 따와 다른 존재로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TS화를 이뤄낸다.
'계백순'의 TS화 전략은 현실과 작품 사이에 절묘한 거리감을 형성한다. "현실의 나와는 다른 성별이므로 작품 속의 이야기는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설정은 작가와 작품, 그리고 독자와 작품 사이에 안전한 거리를 확보해준다. 동시에 이는 '대리 만족'을 구현하는 핵심 장치로 작용한다.
현실에서 마주하는 고통스러운 경험들이 귀여운 여성 캐릭터를 통해 재구성되면서, 실패의 경험은 독자들이 공감하고 소비할 수 있는 '모에 요소'로 승화된다. "萌え化 모에카이" 또는 모에 의인화(일본어: 萌え擬人化 모에 기진카)는 애니메이션 및 만화에서 모에 요소들이 인간이 아닌 물체, 개념, 현상 등에게 주어지는 형태의 의인화이다.
이는 단순한 현실 도피를 넘어서, 실패라는 경험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독특한 서사 전략으로 기능한다. '계백순'의 TS화는 결과적으로 독자들이 실패와 좌절이라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안전한 거리에서 마주하고 소화할 수 있게 만드는 장치가 된다.
'계백순'은 디시인사이드 '카툰-연재 갤러리'와 루리웹 '만화 게시판'에서 첫 연재를 시작했다. 이 커뮤니티들은 아마추어 작가들의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창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공간이다. 주류 웹툰 플랫폼과는 확연히 다른 문화적 특성을 지닌 이곳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취향과 관심사를 거침없이 드러내며 작품과 교감한다.
때로는 오타쿠 문화의 특징이 강하게 표출되어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이곳은 수많은 신진 작가들을 배출해온 창작의 인큐베이터다. 네이버나 카카오웹툰과 같은 주류 플랫폼에서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실험적인 시도들이 이루어지는 곳이며, 때로는 드러내기 힘든 독자들의 욕망과 현실이 솔직하게 반영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위로와 풍자 사이
한국 웹툰계에서 청년들의 실패와 좌절을 다루는 작품들은 꾸준히 인기를 얻어왔다. 그중에서도 '무직백수 계백순'과 '복학왕'은 같은 주제를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풀어낸 대표적인 작품이다. '복학왕'은 2014년에 연재를 시작해 2021년에 연재를 종료한 작품으로, 기안84의 대표 웹툰 ‘패션왕’ 후속작이다. 현실의 인간군상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며 독자들의 깊은 공감을 얻었고,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발견했다.
'복학왕'은 지방대생 우기명의 이야기를 통해 청년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그려낸다. 기안84의 대표작인 이 작품은 미화나 과장 없이 지방대생들의 치열한 생존 경쟁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예를 들어, 우기명이 회사 면접에서 번번이 탈락하는 모습이나, 학교 도서관에서 몇 년째 보이는 공무원 준비생 등 뜻대로 풀리지 않는 삶에 대한 좌절감은 많은 청년들의 실제 경험과 맞닿아 있다.
'복학왕'은 그러한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희화화하며 풍자하는 만화로서 독자들에게 큰 공감과 인기를 샀다. ‘복학왕’은 현실을 직설적으로 드러내며 독자들에게 '저렇게 살면 안된다'는 강력한 경각심을 일깨운다.
이처럼 '복학왕'이 청년들의 고단한 현실을 날카로운 풍자로 그려냈다면, '계백순'은 같은 ‘청년의 실패’라는 소재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계백순'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들의 즉각적인 정서적 반응을 이끌어내는 모에 요소들의 집합체라는 점이다.
커다란 눈과 흰피부, 작은코, 곱슬머리와 같은 시각적 요소들은 작품의 무거운 주제와 대비되며 독특한 매력을 만들어낸다. 여기에 수줍으면서도 엉뚱한 성격과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나 볼 법한 어색한 말투는 캐릭터의 귀여움을 배가시킨다. 독자들이 지적하듯 계백순의 말투는 "현실에 있는 사람이라기보단 커뮤니티에서 백수라 불리며 자학하는 사람들의 그것"이다.
이러한 매력은 캐릭터의 생활공간을 통해 더욱 구체화된다. '막장동 벼랑빌' 303호에 쌓인 배달음식 용기들, 청소되지 않은 방, 컵라면 등은 '실패한 청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계백순이라는 캐릭터의 일상적 매력을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최근 오픈한 ‘계백순’의 팝업스토어 ‘이렇게 살아도 안 망해’는 이러한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계백순의 방구석을 재현한 포토존과 각종 굿즈들은 한때 무기력의 상징이었던 공간이 어떻게 소비와 향유의 대상으로 전환되는지 보여주는 완벽한 사례다.
'복학왕'이 청년들의 분노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경각심을 주었다면, '계백순'은 그 고통을 재해석하고 승화하는 전략을 택한 것이다. 여기에는 더 이상 위기감이나 경고의 메시지가 없다. 대신 실패와 좌절을 하나의 문화적 코드로 받아들이고, 이를 통해 새로운 위안과 공감의 방식을 만들어낸다.
이는 단순히 현실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청년세대가 직면한 고단한 현실을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소화하고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계백순'은 실패와 좌절이라는 보편적 경험을 독특한 캐릭터와 서사를 통해 재해석함으로써, 동시대 청년들에게 위로와 공감을 전달하는데 성공했다.
공감과 연대
독자들은 계백순의 일상에서 작은 성취와 노력의 흔적들을 발견하며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오늘은 운동을 했으니 대견하다", "부모님께 효도하려는 마음만은 착하다"와 같은 댓글들은 주인공의 사소한 진전마저 격려하고 지지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객관적으로는 니트족의 무기력한 일상을 보여주는 장면들이지만, 독자들은 오히려 이를 통해 계백순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위로받는다. 실업과 취업난이라는 구조적 문제 앞에서 힘겨워하는 청년들에게, 계백순의 좌충우돌 일상은 비난의 대상이 아닌 공감과 연대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이처럼 작품은 실패와 좌절이라는 무거운 주제를 다루면서도, 따뜻한 시선과 유머로 독자들을 위로한다.
2023년 국내 첫 실태조사에서 드러난 54만 명의 고립·은둔 청년들의 존재는, '계백순'이 단순한 픽션이 아님을 보여준다. 특히 주목할 만한 대목은 조사대상자의 80% 이상이 현재의 상태를 벗어나고 싶어 하지만 방법을 찾지 못하며, 그중 45%는 탈고립을 시도했으나 다시 고립되었다는 점이다. '교통비, 식사비 등 외출하기 위한 최소한의 금액을 마련하기 어려웠다'는 조사 보고서의 건조한 주석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문제의 심각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무직백수 계백순'은 한국 대중문화의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준다. 실패라는 경험을 개별적인 요소들로 분해하고 재구성함으로써, 작품은 우리가 실패를 더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게 한다. 학창 시절의 좌절, 직장에서의 소외, 꿈의 좌절, 구직의 실패 등이 하나의 캐릭터 안에서 세밀하게 관찰되고 재해석된다. 이러한 접근은 실패와 고립이라는 현상을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방식을 제시한다.
결국 '무직백수 계백순'은 단순한 웹툰 그 이상이다. 그것은 우리 시대 청년들의 실패를 더 섬세하게 이해하려는 시도이자, 그들의 고립을 더 깊이 있게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의 제안이다. 실패를 극복하는 방법을 제시하는 대신, 작품은 실패를 더 잘 이해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이러한 이해야말로 우리 사회가 청년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 진정으로 필요한 첫걸음일지 모른다. (끝)
작성일: 2024년 12월 8일
저자소개: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를 졸업하고 현재 서울대학교 언론정보학과 석사과정에 재학 중인 문화콘텐츠 크리에이터이다. 매체 '위드온 뉴스'를 운영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