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힘 잃은 다큐가 K콘텐츠에 미치는 영향: 한류의 사각지대 'TV 다큐멘터리'

한국 TV 다큐멘터리는 최근 여러 어려움에 직면하고 있다. 방송사들은 시장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 오락 프로그램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제작비 부족으로 축소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한국 TV 다큐멘터리의 다양성과 진실 추구에 위협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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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경 | 베를린자유대 한국학연구소


BBC 탐사보도팀 'BBC  Eye' 가 2024년  5월  공개한 다큐멘터리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는 한류의 어두운 이면을 조명하며 세계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일부 케이팝 스타들의 일그러진 성(性) 인식과 추문을 취재하고 보도하는 과정에서 고통과 희생을 감내해야 했던 두 여성 기자의 목소리를 담담하게 그려낸 이 다큐멘터리는 방영 한 달이 채 안된 6월 12일 현재까지, BBC world service와 BBC 뉴스 코리아 등 단 두 개의 유튜브 채널을 통해 1500만 회 이상의 조회수를 기록한 것이다.

다큐멘터리가 공개되자 국내 시청자들의 반응은 충격과 당혹감으로 가득했다. ‘나라 망신’이라는 자조 섞인 한탄부터 연예계와 유흥업계, 경찰의 고질적인 유착관계, 그리고 피해자는 공격하고 가해자는 솜방망이 처벌하는 한국의 사법 시스템에 대한 분노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병폐에 공분을 드러냈다. 케이팝으로 대표되는 한류 콘텐츠가 세계적 인기를 누리는 상황에서 이번 보도로 인해 한국 대중문화산업의 위축을 우려하는 목소리 또한 적지 않았다.

잊거나 묻어버린 진실

그러나 필자가 주목한 것은 한국 연예계를 뒤흔든 충격적인 사건이 해외 언론에서 제작되는 동안, 국내 방송사들은 무엇을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사건 초기MBC와 SBS 등의 탐사 프로그램에서 다뤄지기는 했지만 깊이 있는 보도로 이어지지는 못했다.  오히려 우리 언론은 속보 경쟁에 휩싸여 피해자의 성폭행 상황에만 집중하는 선정적 보도로 사건의 본질을 흐리는 데 일조했다.

사실관계와 맥락을 파악하여 사회적 의제를 길잡이 해야 할 공영방송의 다큐멘터리조차 길을 잃었다. 연예계 내부의 권력남용과 성범죄, 이를 비호하는 비리 구조를 파헤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놓치고 만 것이다. 반면 외국언론 BBC는 수년간 꾸준히 이 사안에 주목하며 다양한 채널을 통해 사건의 실체에 접근했다. BBC뉴스를 통해 사실을 전하는 한편, 실화나 범죄 사건을 다루는 ‘인트리그(Intrigue)’라는 BBC 라디오 4 팟캐스트 시리즈에서 각 30분씩 총 6개의 에피소드로 버닝썬 게이트를 집중 조명하기도 했다.

이를 바탕으로 장편 다큐멘터리까지 완성하는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이는 BBC의 콘텐츠 생산방식과 편성전략이 단순히 ‘장사될 만한 아이템’을 쫓는 것이 아니라, 여러 채널과 프로그램을 넘나들며 다각적인 관점과 주제로 이야기를 축적하면서 사회적 의미를 끌어내는 데 주력한다는 점을 보여준다.

BBC 다큐멘터리가 대중문화산업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친 것은 이번만이 아니다.  2023년에는 일본 아이돌 시스템의 창시자 ‘쟈니 기타가와’의 성추문을 폭로해 일본 엔터업계의 절대자로 군림했던 기획사 쟈니스의 몰락을 불러왔고, 헐리우드의 거물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미투 사건,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에이미 와인하우스를 둘러싼 논란들을 취급하기도 했다. 연예계와 셀럽이라는 지극히 대중적인 소재를 다루면서도 당대 사회비판이 향해야 할 지점을 놓치지 않는 그들의 접근법은  상업적 성공 못지않게 사회적 설득력을 얻는 비결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길 잃은 K-다큐

한국의 방송사들은 그 규모와 역사에 걸맞는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프로그램들을 보유하고 있다. KBS “다큐인사이트”, MBC “PD수첩”, SBS “그것이 알고 싶다”, EBS “다큐프라임” 등 각 방송사의 간판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은 저마다의 색깔과 개성으로 시청자들에게 다가가고 있지만 과거의 영광에 비해 그 위상이 예전만 못한 것이 사실이다.

1980년대 말, 민주화의 열망을 타고 등장한 탐사고발 다큐와 시사·역사 다큐 시리즈들은 IMF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광고시장의 위축으로 직격탄을 맞기 시작했다. 미디어 산업의 사영화(privatization)와 상업화를 재촉하는 정책적 변화와 종합편성채널의 등장으로 인한 광고유치 경쟁의 심화는 한국 TV 다큐멘터리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이러한 외부적 도전 속에서 방송사들은 장르간 경계를 허물고 제작비 절감을 도모하는 등 자구책 마련에 나서기도 했다. 다큐멘터리 편성 시간을 줄이는 대신 ‘인포테인먼트’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외주 제작을 확대하며 수익성 제고에도 애를 썼다. 하지만 ‘리얼리티’는 점차 시사교양의 영역에서 예능의 영역으로 그 무게중심을 옮겨갔고, 불편한 진실을 대면하기보다 ‘진짜 같은 환상’ 속에서 현실을 잊고 싶어하는 대중의 욕구는 다큐멘터리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유튜브와 넷플릭스의 등장은 시사교양 제작자들에게 위기이자 기회로 다가왔다. 유튜브의 간결한 숏폼 인문지식 콘텐츠와 스마트폰만 있으면 실행 가능한 생방송 기능은 지상파 방송사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시사교양 장르를 대중의 손안에 쥐어주었다. 이른바 ‘토크 헤드 (talk head)’ 포맷을 활용한 쌍방향 소통형 시사 논평은 TV 뉴스 못지않은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한편 넷플릭스는 재난물이나 범죄수사물을 비롯해 정치와 역사, 스포츠, 연예계 셀러브리티 다큐, 이국적 정취를 담은 여행·음식 다큐 등 광범위한 소재에 극적인 서사와 표현을 글로벌 포맷화하며 다큐멘터리 장르에 새로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기존 방송 다큐의 5~6배의 달하는 제작비가 투입되고, 국내 방송 채널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과감한 소재나 표현이 허용되는 넷플릭스에 입성하기 위해 방송사 PD들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영국 공영방송 BBC 탐사보도팀 ‘BBC Eye’가 만든 다큐멘터리 <버닝썬: K팝 스타들의 비밀 대화방을 폭로한 여성들의 이야기>. 5년 전 뜨거운 화제가 되었지만 이제는 잊혀진 ‘버닝썬 사건’이라는 성범죄를 추적하고 증언한 ‘여성들’의 목소리를 중심에 두면서 사건을 재이슈화 하는데 성공했다.
미디어 산업의 사영화(privatization)와 상업화를 재촉하는 정책적 변화와 종합편성채널의 등장으로 인한 광고유치 경쟁의 심화는 한국 TV 다큐멘터리의 위기를 가속화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생태계 붕괴

2022년의 새해를 하루 앞둔 전날, 방송통신위원회는 주요 방송사들의 오락 프로그램 편성 비율 제한을 매월 50% 이하’에서 ‘매 반기 60% 이하’로 완화하는 정책을 발표했다. 대체로 뉴스보도 30%, 시사교양 20%, 오락 50%대로 유지돼 왔던 편성 비율이 20여년 만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한류 콘텐츠의 핵심인 드라마·예능 등 방송 프로그램의 경쟁력 강화”를 명목으로 도입된 편성규제 완화 정책은 다큐멘터리를 비롯한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을 축소하여 방송 콘텐츠의 다양성을 파괴시킨 계기로 작용했다.

방송사들은 수익성을 고려하여 제작비 대부분을 드라마나 예능 같은 오락 프로그램에 투입하고 시사교양 프로그램은 협찬이나 지원금에 의존하게 되었다. 외주제작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심지어 자체 제작 다큐멘터리조차 협찬금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광고성 정보를 담은 프로그램들이 다큐멘터리로 포장되어 방영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텔레비전 시청률이 높은 중장년을 겨냥한 이른바 ‘건기식(건강기능성식품)  다큐’도 이런 구조 속에서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방송 분야가 콘텐츠의 글로벌 수급과 유통을 중심으로 재편되었으니 시장 논리에 맡기고, 다큐멘터리는 영화 부문에서 지원하는 것이 효율적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실제로 DMZ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 EBS 국제다큐영화제(EIDF), 전주국제영화제 등에서 다큐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제도가 도입된 후 2010년 즈음부터 한국 다큐멘터리 영화들이 해외로부터 주목받기 시작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영화제나 펀드 지원만으로는 다큐멘터리 제작 인력들을 충분히 키워 내기 어렵다. 국제영화제 수상자들 상당수는 방송 다큐나 시사교양 프로그램들을 제작한 이력을 갖고 있고, 이러한 경험들이 다큐멘터리스트들의 역량을 축적하는 기회로 작용했던 것이다.

제작 네트워크 복원

영국과 독일, 미국, 중국 등 주요 국가들의 다큐멘터리의 생산 경로를 보더라도 자국의 방송 네트워크를 통해 공급되는 비중이 상당하다. 상업적인 성과보다 사회비평과 문화적 다양성의 가치에 무게를 두고 정책적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한국 TV 다큐멘터리의 급격한 쇠퇴는 공영방송의 몰락과 무관하지 않다.

공영방송을 둘러싼 사회적 논의가 정치적 대립으로 정체된 사이, 한국 다큐멘터리는 글로벌 소비를 겨냥한 소수의 OTT 용 콘텐츠를 제외하고는 그 공급 기반이 무너지고 있다. TV 다큐멘터리 생태계의 위기는 단순히 하나의 장르가 쇠퇴하는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우리 사회의 다양성과 비판적 사고, 그리고 진실에 대한 추구가 위협받고 있으며, 이는 대중문화 스토리텔링의 주요한 출처가 삭제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큐멘터리 장르가 가진 진정성이 ‘실미도’와 ‘살인의 추억’, ‘도가니’ 같은 영화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처럼, 진실을 다루는 형식으로서 다큐멘터리의 가치는 한류의 지속가능성과 다양성 측면에서도 결코 가볍지 않다. 대중문화는 서로 다른 장르와 서사를 넘나드는  상호인용을 통해 확장되고 진화한다는 측면에서, 다큐멘터리 없는 K-콘텐츠는 한쪽 날개를 잃은 채 불안정하게 비행하고 있는 셈이다.(끝)

글 작성일: 2024-06-12

저자소개 : 글쓴이 정수경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방송작가로 일하며 시사 및 역사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산업과 장르, 생산과 수용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를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