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한국 영상산업 위기론 : '콘텐츠 산업' 몰락하면 한류도 없다
오늘 넷플릭스 속에서 보는 한국 콘텐츠는 지난 시기에 결정을 한 것이고, 오늘 결정을 해야 하는 것들을 우리는 적정한 미래에 시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장은 중요한 결정을 하지 못하고 대체제를 찾기 시작했다.
조 영 신 | SK브로드밴드 실장
# 1
“불닭 볶음면이 네덜란드서 금지 품목이 되었대”
덴마크 정부는 삼양라면의 핵불닭 볶음면 3가지 매운 맛에 대해서 리콜(제작결함시정)을 결정했다는 BBC 방송보도가 있은 직후, 유럽 전역에 걸쳐 불닭면 판매가 오히려 치솟는 현상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품귀 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는 후문이다. 이제 해외에서의 판매 비중이 삼양 전체 매출의 70%는 넘는 상황으로까지 발전했다.
CJ제일제당은 2019년 미국 냉동기업 ‘슈완스’를 인수했다. 2조원이 넘는 대형 인수였으며 그룹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인수 합병 기록을 세웠다. 24년 현재 CJ제일제당의 미국 매출은 5억달러를 넘어섰다. 비비고 등 한국 냉동식품은 과거 매니아 지향을 넘어서 미국의 보통의 소비자들이 선택하는 식품으로 성장했다.
한국경제신문은 미국 현지 식품 업체 관계자의 입을 빌어 “세계 최대 소비시장인 미국은 1인당 국민소득이 7만 달러 이상으로 구매력이 높고, 미국을 뚫으면 남미·유럽 확대가 수월하다는 점에서 업계의 성장 기대가 크다”며 “한류가 언제 멈출까 했던 걱정이 이제는 과연 어디까지 뻗어 나갈까 라는 기대로 바뀌었다”고 보도했다. 과거 호기심의 대상이던 K-푸드가 오늘날 글로벌 시장에서 당당히 돈을 버는 블루칩 산업으로 성장하고 있는 것이다.
#2. 보는 것을 믿는다
오랜 시간 화장품 시장은 프랑스와 미국 중심으로 발전해왔다. 115년 역사의 로레알은 물론이고, 유니레버나 에스티로데 같은 영미권 국가가 시장을 주도한 것이다. 그러던 이 시장에서 한국이 세계 화장품 3대 수출국 중 하나가 되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중국 시장에 갇혀 있던 한국 화장품이 K-뷰티(beauty)라는 이름으로 전 세계로 확장된 것이다. 2015년 2.9억 달러였던 수출액이 22년에는 9.5억달러에 이를 정도로 급성장했다. 일부에서는 스마크폰 수출보다 화장품 수출액이 더 많아졌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한류 초창기 중국을 중심으로 K-뷰티 산업이 성장할때만 하더라도 아모레 등 몇몇 대형 브랜드 의존이 높았던 반면에 이제는 코스맥스나 한국콜마와 같은 ODM 업체들이 중소 브랜드와 결합해서 아마존 등을 통해서 글로벌로 저변을 확산시켰다. 구글에서 상위 검색어 중의 하나가 바로 “유리 피부(glass skin)”이다. 이 유리피부라는 설명은 한국식 스킨케어를 칭하는 고유명사가 되었다. 한국 연예인들의 맑고 투명한 소위 ‘글래스스킨’룩의 인기 덕분이기도 했다. 전 지구적 현상이다.
비단 이 뿐일까? K라는 접두어는 무언가 특별하고 의미있는 단어가 되었다. 패션, 조선, 방역 등 뭔가 새로운 것들에는 다 K를 붙이면서 의미를 부여했다. 이들에는 2가지 공통점이 있다. 현상의 확대가 산업의 성장과 같은 말(동의어)라는 점이다.
K-beauty가 인기를 끌면 관련 산업도 성장했다. 우리보다 큰 시장 규모를 가지고 있기에 글로벌 시장에서 인기를 끈다는 것 자체가 엄청난 산업적 성과와 직결될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론이다. 이 모두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바로 한국 영상 콘텐츠라는 점이다.
“별에서 온 그대”에서 치맥을 관광상품화시켰고, 아이돌과 한국 연예인들의 자연스러운 피부톤이 “유리피부”란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이 대표적 사례다.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확인하고, 자기 손으로 느낀 것들을 신뢰한다. 넷플릭스를 통해 한국 콘텐츠를 접하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한국의 생경한 먹을 것과 배우들의 깨끗한 피부에 반해서 직접 하나둘 확인하고 전파하는 과정 속에서 오늘날 K가 자리잡은 것이다.
#3. 되풀이 되는 위기론?
그런데 정작 한국의 영상 콘텐츠 산업은 전례없는 위기에 신음하고 있다. 세계적 유행을 만들어 내긴 했지만 산업적 성과를 거두기에는 아직 임계점을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한류, 즉 “K”의 유행을 이끌던 원조(原祖), 바로 그 원조가 지금 크게 흔들리고 있다.
최근 영화제작사들은 <영화산업 위기 극복을 위한 영화인연대>를 결성했다. 팬데믹으로 제한적인 상영을 거듭하던 국내 극장은 간신히 문을 활짝 열었으나, 극장에 걸만한 제대로 투자한 영화가 없는 게 작금의 현실이다. 코로나로 인한 산업의 대위기로 영화 기획이 중단되었던 여파가 이제서야 본격적으로 밀어 닥친 것이다.
코로나 기간에도 전세계 콘텐츠 생산기지로 작동하던 한국의 콘텐츠 사업이 영화부터 하나씩 무너지고 있다. 영화는 워낙 극장산업이 코로나의 직격탄을 맞았으니 그려려니 한다고 하더라도, 이제는 드라마 제작 시장도 무너지고 있다. 방송 관계자를 만날 때마다 숫자는 조금씩 달라지긴 하지만, 지금 현재 제작은 되었으나 방송 편성 시간을 잡지 못한 드라마의 숫자가 120여편이 넘어섰다. 얼마전 영화 시장의 재판이다.
스포츠로 사람들의 이용시간을 늘렸다고 한국 OTT(온라인동영상서비스)가 자랑하는 그 순간에 오리지널 드라마의 편성 숫자는 줄어들고 있다. 공중파 TV는 TV대로 광고 수익으론 도저히 제대로된 드라마를 방영할 수 없어 편성 숫자를 줄이고 있고, 넷플릭스는 슬슬 넷플릭스’한국’보다는 넷플릭스’재팬’의 비중을 높이고 있다.
그래도 먹고는 살아야 하니 한국 영화계는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하지만 이 시장에는 허울 좋은 브로커만 넘칠뿐 성사된 건은 드물고 뾰족한 수익으로 이어진 건수는 더 미미하다. 이보다 훨씬 더 안좋은 상황은 한국 드라마 업계가 넷플릭스에 묶여 시장을 이끌만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실정이라는 사실이다.
#4. 산업이 한류 만든다
“콘텐츠 산업이 붕괴 직전이예요”
이런 말을 건네면, “언제 위기가 아닌 적도 있었나요? 기업들은 맨날 우는 소리만해요. 그러면서 다들 커 왔어요”란 대답이 나오기 일쑤다. 이러한 반응을 듣고나면 그나마 남아 있던 열정도 사라지기 마련이다. 이제야 조금씩 국내 언론에서 “미디어 산업의 위기”라는 기사가 나오지만 정작 기사를 만들어 내는 언론사도 고개를 갸우뚱한다. ‘한류가 글로벌 대세인데, 무슨?’ 이라고 하면서 말이다.
산업의 발전에는 투자에서 가시적 성과에 이르는 “시간 차”라는 요소를 반드시 감안해야 한다. 드라마나 영화는 기획에서 상영까지 적게는 1~2년, 많게는 3~4년간의 시차가 있다. 오늘 넷플릭스 속에서 보는 한국 콘텐츠는 지난 시기에 결정을 한 것이고, 오늘 결정을 해야 하는 것들을 우리는 적정한 미래에 시청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시장은 중요한 (투자) 결정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체제를 찾기 시작했다. 드라마 대신에 예능을 이야기하고, 한국 작품 대신에 일본 것을 이야기한다. 이런 방식으로 불과 2~3년만 흐르게 되면 오늘의 모습은 더 이상 화면에서 찾아 볼 수가 없게되는 것이다.
이를 간과하지 않으려면 막연한 ‘한류 대세’에 취해있기 보다는 현재를 그대로 직시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한류쟁이’의 환호에 취해서는 주저앉고 있는 한국 영상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울수가 없다. 그렇게 한국 영상 산업이 주저 앉으면 오늘 말하는 K의 모든 것은 신기루처럼 사라질지도 모르겠다.
얼마 전 한 영화계 지인은 내게 이렇게 강조했다.
“산업이 무너지면 한류도 사라집니다. 언제나 산업이 먼저에요.”
작성일 : 2024-08-05
조영신 | SK경영경제연구소에서 수년 동안 미디어 시장의 변화와 갈 길을 연구하다가, 2019년부터는 SK브로드밴드에서 미디어 사업의 실행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