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파격적인 파리', '줄어든 TV 영향력', '늘어난 개인서사', '상상력 부족했던 한류' … 문화연구자가 본 파리올림픽
스포츠 시장의 다양화로 인한 각종 국제대회들과의 경쟁 심화, 프로 리그들의 성장과 인기 상승으로 올림픽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비추어 봐도 기존의 접근 법으로는 사뭇 낯선 현상이 두드러진 대회였다.
정수경 | 베를린자유대 한국학과 연구원
잔치가 끝났다.
1924년 현대 올림픽의 표준을 마련한 대회로 역사적 평가를 받았던 파리에서, 무려 백 년만에 다시 열린 올림픽이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번 파리 올림픽은 논란의 연속이었다. 새 경기장을 짓는 대신 역사적 명소를 경연무대로 탈바꿈해 비용을 줄인 경제적 행사로, 에어콘과 아보카도를 퇴출시킨 친환경축제로, 남녀 선수 참가비율을 50대 50으로 동등하게 맞춘 성평등 대회로,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와 협업한 것으로 유명한 일러스터 위고 가토니(Ugo Gatoni)가 한땀 한땀 손수 그린 포스터로, 대회가 열리기 전부터 기대감을 한껏 끌어올렸지만, 치안 문제와 교통 혼잡, 폭염 대책 미비와 식단을 둘러싼 잡음이 연이어 불거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행사였다.
문화연구자에게 올림픽은 단연 개막식으로 시선이 집중된다. 예술과 혁신의 도시라는 명성답게 파리는 이번 올림픽에서도 파격적이고 독특한 아이디어로 경탄과 비난을 동시에 자아냈다. 시작은 아름다웠다. 파리를 관통하는 센강을 따라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콩코드 광장, 그랑팔레를 지나 에펠탑 인근 트로카데로 광장까지 이어진 개막식장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예술의 도시 파리가 가진 문화적 유산을 롱테이크로 담아낸 명장면이었다.
“파리, 그 자체가 올림픽”
그러나 땅에서 지켜본 축하 무대들은 각각의 섹션이 표방한 주제의식과 화려한 출연진이 무색할만큼 이미지 연출이 충격적이고 구성은 분절적이고 난해하여 대중의 공감을 자아내는 데 방해 요인으로 작용했다. 프랑스를 대표하는 역사와 예술, 대중문화를 한데 버무린 구성은 꽤나 불친절해서, 각각의 상징기호를 알아챈 사람들의 열광과 미처 이해하지 못해 난감한 사람들의 불평으로 확연히 갈렸다. 마치 한 편의 누벨바그 영화처럼 개막식은 ‘아방가르드’ 했고, 세간의 평가도 그만큼 천양지차였다.
올림픽 개막식이 주목받는 이유는 한 나라의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 수준을 드러내는 바로미터이기 때문이다. 문화적 쇼케이스로서 개막식은 개최국의 역사와 문화, 예술을 세계에 알리는 기회일 뿐 아니라 국가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드러내는 플랫폼이기도 하다.
전세계의 선수들이 모인 자리에서 세계 평화와 환경 보호, 인권 등 글로벌 이슈에 대한 개최국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최신 기술을 활용한 창의적이고 예술적인 공연으로 개최 도시와 국가 브랜드 가치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개막식에서 제시된 메시지와 비전은 미디어를 통해 전세계로 전달되어 세계인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관광과 투자 유치의 계기로 작용함으로써 경제적 효과까지 노릴 수 있다. 88 서울 올림픽이 우리나라의 경제 성장과 사회 발전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돌이켜본다면 올림픽 부대 행사들이 가지는 중요성을 결코 낮춰볼 수 없을 것이다.
한류의 기점, 88올림픽
사실 한류의 기점을 88 올림픽으로 꼽는 이들도 적지 않다. 한류의 역사를 문화산업의 관점에서 기술한 “한류외전”의 저자 김윤지는 올림픽이 한국 사회에 본격적인 문화 개방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다고 강조한다.
한류의 성공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가 산업화라고 한다면, 한국 대중문화의 맏형격인 영화가 맨먼저 산업화의 길을 걷게 된 것이 바로 서울올림픽을 전후로 이뤄진 우루과이라운드 협상과 그로 인한 할리우드 영화사의 외화 직배 허용, 즉 한국 영화시장의 개방에서 비롯되었다. 한국 대중문화 제작자들이 ‘우리’가 아닌 ‘타자’, 세계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시장 개방에 대한 대응으로서 문화 수출을 적극적으로 고민하기 시작한 기폭제가 올림픽이란 무대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 파리 올림픽을 지켜보면서 지난 한 세기동안 지구촌의 가장 큰 축제이자 경연으로 구가해온 올림픽의 위상과 표준이 흔들리고 있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스포츠 시장의 다양화로 인한 각종 국제대회들과의 경쟁 심화, 프로 리그들의 성장과 인기 상승으로 올림픽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떨어진 이유도 있겠지만, 미디어와 대중문화의 차원에서 비추어 봐도 기존의 접근 법으로는 사뭇 낯선 현상이 두드러진 대회였다.
변화의 조짐
우선 TV의 위력이 크게 약화되었음을 여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는 올림픽이나 월드컵 같은 대규모 국제대회가 열리면 방송사마다 앞다투어 대규모 취재단을 파견하고 스포츠국 뿐만 아니라 예능, 시사교양 파트에서도 특집물과 기획 시리즈를 준비하여 편성표를 올림픽 관련 프로그램으로 채우기 일쑤였다. 2002년 MBC ‘이경규가 간다’에서 월드컵 참관기로 큰 성공을 거둔 이후로 국제경기는 예능 프로그램의 단골 특집 소재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중계 인력도, 시간도 줄었고 이렇다 할 특집 프로그램도 눈에 띄지 않았다. 전문 방송인이나 연예인 대신에 프랑스 출신 방송인 파비앙이나 유튜버 침착맨, 일명 ‘골때녀’로 불리는 축구예능에 출연한 패션 모델 등 인플루언서들을 내세워 콘텐츠를 제작한 것도 이례적이다. 이는 국내 방송사만의 현상이 아니다. 해외에서도 NBC와 유로스포츠 등 방송사들이 유튜브와 계약을 맺고 하이라이트를 제공하고 유명 유튜버나 틱톡커를 파리로 파견해 콘텐츠를 만들기도 했다.
두번째로는 메달 경쟁에 열중하는 국가 대항전의 의미가 퇴색되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어느 나라 선수가 1등을 했는지, 어떤 국가가 시상식장에서 울려퍼졌는지, 승패에 의미를 두고 금, 은, 동메달의 수를 세며 국가별 순위를 매기는 데 열을 올렸다면 지금은 선수 개개인의 이야기에 대중들의 관심이 쏠리는 경향이 강하다.
선수개인의 서사(敍事)
여자 펜싱 사브르에 출전한 우크라이나의 올하 하를란(Olga Kharlan) 선수가 동메달을 획득하자 한국의 네티즌들은 어느 때보다 열띤 반응을 보였다. 그녀가 올림픽 개최 전에 열린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자국과의 전쟁 상대인 러시아의 대표 선수와 겨뤄 이겼으나 상대 선수의 악수를 거부하는 바람에 실격패를 당한 사연에 공감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예로, 양궁 남자 개인전에 출전한 차드의 국가대표 이스라엘 마다예 선수는 우리나라의 김우진 선수와 겨룬 경기에서 1점을 쏘면서 시청자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중들은 그의 저조한 성적을 비웃기보다 과거 프랑스의 식민지였던 아프리카의 최빈국 차드의 대표로서 국가나 기업의 지원없이 스스로 배우고 연습해서 올림픽 출전 자격을 따낸 사실에 주목하고 그의 분투에 열광적인 응원을 보냈다.
이처럼 메달의 색깔에 집착하지 않고 선수 개인의 서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현상은 국가를 중심에 내세우고 국가의 정체성과 대표성을 선수에게 투영해온 유력 방송사들의 국가주의적 내러티브가 더 이상 대중에게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어렵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대중은 엘론 머스크가 포스팅한 한국 여자 사격 김예지 선수의 세계신기록 갱신 순간과 무표정, 손가락에 건 코끼리 인형이 달린 수건이 자아내는 극적인 대비를 발빠르게 공유하며 새로운 이야기와 신선한 이미지를 발견하는 일에 열심이다. 우승의 순간에도 냉정한 표정을 유지한 채 돌아서는 그녀의 모습에서 전설적인 킬러 캐릭터 존 윅을 떠올리는 건 국적과 언어를 불문하고 전세계인들로부터 공감을 일으킨다. 모두의 손에 쥐어진 디지털 미디어와 대중문화 콘텐츠로 각인된 이미지는 그만큼 영향력과 파급력이 큰 까닭이다.
한류와 코리아하우스
파리 올림픽이 보여준 또 하나의 발견은 한류가 전세계 젊은 세대의 대표적인 향유 문화로 굳건히 자리잡았음을 확인한 것이다.
파리는 유럽에서 타문화의 수용과 교류가 가장 활발한 도시로 꼽힌다. 한류가 유럽에 깊이 유입되었음을 맨 먼저 알린 사건이 2011년 5월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열린 케이팝 팬들의 시위였다. 그해 6월 SM 타운이 7천석 규모의 공연장에서 단 한차례 공연한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프랑스 외에 인근 국가 팬들까지 가세해 티켓 전쟁이 벌어졌고 15분만에 입장권이 동이 난 것.
자연스레 표를 구입하지 못한 케이팝 팬들이 루브르박물관 입구에 모여, 공연을 연장하라는 강렬한 요구를 했던 것이다. “소녀시대”와 “샤이니” 등을 응원하는 피켓과 플래카드를 들고 노래를 부르는 유럽 팬들의 모습은 현지인들은 물론 케이팝의 본산인 한국의 연예제작자들조차 난생 처음 목도한 장면이었고, 한류가 아시아를 넘어 전세계로 확장되었음을 증명한 역사적 문화현상이었다.
그랬던 파리에서 올림픽을 맞아 한국 정부가 역대 최대의 규모의 예산을 투입해 코리아하우스를열었으니 케이팝 팬들의 성지순례가 이어질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올림픽 기간동안 국내 뉴스에선 코리아하우스를 찾은 방문객 행렬과 현지 홍보전을 소개하는 기사들이 넘쳐났다.
한국의 대표적인 연예기획사 아이돌들이 출연한 한류 관광 영상을 보면서, 한국 푸드기업들이 만든 떡볶이와 치킨을 시식하고, 한국 화장품 업체가 출시한 제품으로 메이크업을 해보고 한복 입어보기 행사로 한국의 참멋을 경험해 본다는 리포팅은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기업의 마케팅을 바탕으로 한 K-팝, K-뷰티, K-푸드로 연결되는 코리아하우스의 한류 체험현장은 글로벌 청소년들의 문화소비를 한자리에 모아놓은 원스톱 쇼핑몰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스스로가 정한 한계
그런데, 과연 이것이 최선의 기획이었을까? 올림픽을 겨냥한 한국 문화외교의 현장을 찾은 세계의 청년 세대에게 우리가 보여줄 것이 떡볶이와 케이팝 댄스 수업, 메이크업 워크숍이 전부는 아니었을 것이다. 글로벌 Z세대가 왜 케이팝에 열광하고 한국의 맛과 멋에 매료되었는지를 이해한다면 말이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세계 청소년들의 문화소비를 오랫동안 연구해온 빈센조 치첼리(Vincenzo Cicchelli)와 실비 옥토브루(Sylvie Octobre)는 유럽의 청소년들이 언어나 문화면에서 거의 접점이 없는 한국의 대중문화를 별다른 거부감없이 받아들이고, 더 적극적으로 향유하기 위해 한국어를 배우고 독학으로 한국 문화를 배우는 이유는 한국의 대중문화, 특히 케이팝이 자신의 삶을 대변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이들 연구자들이 직접 만나 인터뷰한 100명이 넘는 청소년들은 케이팝이 그간 표출하지 못했던 자신들의 복잡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비주류 하위문화로 간주되는 케이팝의 위상 자체가 백인×남성×엘리트×기성세대의 편견과 비난에 시달려온 자신들과 다를 바 없는 친밀감을 느낀다고 말한다. 온라인을 기반으로 연결된 케이팝 아이돌과 팬들 사이의 감정적 공유는 민족과 종교, 국가의 경계를 넘어서 글로벌 규모로 형성되어온 것이다.
글로벌 Z세대와 한류
케이팝을 선호하는 글로벌 Z세대들은 ‘아시아적’, 혹은 ‘한국적’ 감정 표현의 특성을 정확히 인식한다. 이들은 케이팝을 통해서 겸손과 절제, 시적인 함축으로 요약되는 감정 규범을 익히면서 단어 하나하나의 뉘앙스를 구별하고 섬세하면서 풍부한 표현을 함께 배운다.
또 케이팝을 같이 따라 부르면서 지구 저편에 사는 또래들과 소통하고 자신이 속한 사회에선 찾아보기 어려운 희소한 문화 자원을 습득하면서 다른 세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타자에 대한 열린 태도를 익히게 된다. 글로벌 Z세대가 옹호하는 케이팝의 가치는 바로 이러한 문화사회적 연대와 성장의 의미를 담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파리올림픽이 주창한 “모두에게 열린 대회”라는 슬로건에 합치하는 정신이라 할 것이다.
청소년 시기는 자기 내면의 목소리와 타인의 시선 사이에서 자유와 행복의 원천을 찾는다. 타인과의 소통 속에서 자아상을 점검하고 자기에 대한 인식에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기도 한다. 타인과의 친밀감과 낯섬 사이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자신을 덮치는 감정을 대면하고 타자의 문화에 대한 태도를 구축한다.
개인의 성장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때라고 할 수 있는 이 시기에 케이팝이, 한국의 대중문화가, 단순한 감상을 넘어 정체성을 형성하고 소속감을 재정의하며 미래의 삶에 대한 태도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실로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만큼 이들을 대상으로 한 문화 기획은 더욱 사려깊고 섬세해야 할 필요가 있다.
요란한 문화외교 주창이나 기업의 상술을 뛰어넘어, 인간에 대한 존중과 배려가 녹아든 한류 기획을 상상할 때가 되었다. 한류가 한때 유행했던 문화상품으로 잊혀지지 않기 위해서는 글로벌 Z세대의 미학과 감성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끝)
작성일 : 2024년 8월 26일
글쓴이 정수경은 199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 초반까지 방송작가로 일하며 시사 및 역사다큐멘터리 제작에 참여한 경험이 있다. 미국 조지아주립대학교에서 언론학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산업과 장르, 생산과 수용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를 연구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