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위기에 더욱 견고해지는 한류: 민주주의와 함께 성장한 'K-콘텐츠'의 내공을 말하다

한국의 대중문화는 단순한 문화 수출을 넘어 글로벌 문화와 소통하고 교류하는 새로운 '한류 정경'을 그려나가고 있다. 과거의 위기 극복 경험은 미래의 도전을 헤쳐나갈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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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기형 | 한국방송공사(KBS) 프로듀서


벌써 한 해가 저문다. 창밖으로 스러져가는 해를 바라보며 지난 시간을 되짚어본다. 한숨 돌릴 틈도 없이 달려온 2024년은 마치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누군가는 얼마전에 터진 어처구니 없는 정변을 떠올리며 코미디 같다고 얘기하겠지만, 현실은 결코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코미디가 아니었다. 삶이 코미디가 될 수 없는 것은 인간 존재의 본질적 무게 때문이다. 우리는 매 순간 선택을 강요받고, 그 선택의 결과를 온전히 감당해야 하는 존재다. 사르트르가 말한 실존적 자유는 곧 우리의 숙명이기도 하다.

실존적 책임의 무게

2024년의 한국 사회는 특히 그러한 실존적 무게를 절감하게 만들었다. 정의와 불의, 진실과 거짓, 희망과 절망이 끊임없이 교차하는 가운데, 우리는 매 순간 판단을 요구받았으며, 이것은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책임이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 마냥 느닷없이 불려나갔을 높으신 나리들은 그때 분명히 노(No)라고 답했어야 한다. 거절하지 못한 순간들은 결국 우리가 져야 할 책임으로 되돌아 오기 때문이다.

침묵은 동의가 되고, 우유부단한 태도는 결국 가해에 대한 방조가 된다. 거절하지 못한 순간들이 모여 거대한 폭력을 만들어내는 과정을 우리는 너무나 많이 목격했다. 우리는 웃음 뒤에 숨은 눈물을, 희극 속에 담긴 비극을 보아야 한다. 현실이 코미디가 될 수 없는 것은, 그것이 우리의 존재 자체와 분리될 수 없기 때문이다. 젊은이들이 겪는 생존의 문제, 기성세대가 마주한 변화의 압박, 사회 전체가 감당해야 할 불확실성은 가벼운 웃음으로 덮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불안이야말로 우리 시대의 가장 정확한 초상이었을지 모른다. 특히 87년 이후 당연한 것으로 여겨왔던 민주주의 가치가 그렇게 허약하게 무너질뻔 했다는 불안은 단순한 정치적 입장을 넘어, 우리 사회의 존재론적 물음이 되었다. 공동체의 책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순간들이었다.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현실을 직시하고 그 속에서 진실과 정의를 찾아가는 용기, 그것이야말로 지난 정변이 우리에게 가르쳐준 가장 큰 교훈일 것이다.

지난 12월의 사건은 코미디 같은 해프닝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 사회의 깊은 고민과 성장, 갈등과 부조리가 담겨있는 서사 드라마였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새해에도 이어질 이 이야기가 결국 어떤 결말을 맺게 될지, 그것은 우리 모두의 몫이다

불안과 성찰

2024년 한국의 현실은 마치 복잡하게 얽힌 서사의 사회극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정치 권력 남용과 무능, 진영 간 첨예한 대립, 세대·계층 간 갈등, 의료 대란 등 사회 곳곳에서 파열음이  균열이 심화되는 가운데, 국제 정세의 긴장감이 더해져 우리 사회는 전례 없는 도전에 직면했다. 국내 정치는 여야의 단순 대립을 넘어, 헌법적 가치와 민주주의의 근간을 재고하게 만드는 중대한 국면을 맞이했다.

한국 경제가 직면한 위기 역시 일시적 경기 침체를 넘어선 구조적 문제를 드러냈다. 가계 부채 2000조 시대의 도래와 함께 시장은 깊은 침체에 빠졌고, 수출 둔화와 청년 실업 심화는 우리 경제의 근본적 취약성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저출산·고령화로 인한 인구 구조의 변화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주력 산업은 신흥국의 맹렬한 추격에 직면했고,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은 지지부진한 상태다. 대기업 중심의 경제 구조는 여전히 공고한 반면, 중소기업의 혁신 동력은 약화되었다. 여기에 미중 갈등, 우크라이나 전쟁의 장기화, 중동발 불안까지 더해져 국제 정세는 혼미했고, 우리 경제는 불황과 구조조정이라는 이중고를 겪어야 했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전쟁의 비극 앞에 노벨상 수상의 기쁨마저 덮어두어야 했던 작가의 양심적 태도는 개인의 영광과 시대의 아픔이 얽혀있는 깊이 있는 성찰이었다. 한류는 세계적으로 호명되며 주목을 이어갔지만, K-콘텐츠 산업 내부의 구조적 취약점은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현실이 되었다.

창작자들이 겪는 열악한 환경과 콘텐츠의 획일화는 한류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강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모든 위기와 시련은 역설적으로 우리 사회가 한 단계 도약하기 위한 필연적 과정일지 모른다. 정치적 혼돈, 경제적 위기, 문화적 도전이라는 삼중고는 새로운 광야를 향한 준비의 시간이며, 더 성숙한 민주주의, 더 견고한 경제 체질, 더 깊이 있는 문화 생태계를 만들어가기 위한 성찰의 여정이다. 그리고 이 여정의 끝에서 우리는 더 넓은 지평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중국의 한한령은 한류가 맞닥뜨린 가장 큰 도전이었다. 
2020년 찾아온 코로나19 팬데믹의 영향 속에서 K-POP은 비대면 콘서트를 진행했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들이 전 세계적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성숙한 사회적 담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성취와 도전

이제 2024년의 마지막 장이 넘어간다. 봄이 오는가 싶더니 여름이 훌쩍 지나갔고, 가을의 단풍이 물들자마자 겨울의 찬 바람이 불어왔다. 계절의 변화처럼 우리 사회도 쉼 없이 변화했다. 정치적 격변, 경제의 부침, 문화적 성취가 숨 가쁘게 교차했다. 돌아보면 아쉬움도 있고 자랑스러움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모든 순간이 우리를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실수는 교훈이 되었고, 성공은 자신감이 되었다.

정변으로 인한 역사적 퇴행을 예감했던 한 정치인은 2024년 오늘의 시련은 새로운 K-팝, K-드라마, K-무비의 소재가 될 것이라며, 한류의 뿌리는 민주주의라는 것을 설파했다. 사실, 한국의 민주화 과정은 단순한 정치체제의 전환을 넘어 문화적 자유와 창의성이 꽃필 수 있는 근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1987년 이후 검열의 완화와 표현의 자유 확대는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의 지평을 열어주었다. 이는 단순한 제도적 변화를 넘어, 문화 생산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추구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민주화 과정에서 성장한 시민의식은 문화 소비자들의 안목과 기대수준을 높였다.

시민들은 더 이상 수동적인 관객이 아닌, 적극적인 문화 향유자이자 비평가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숙한 시민의식은 한류 콘텐츠의 질적 수준을 끊임없이 향상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특히 소셜 미디어와 디지털 플랫폼의 확산은 시민들의 문화적 참여와 소통이 더욱 활발해지면서, 창작자와 수용자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새로운 형태의 문화적 공론장이 형성되었다

민주화는 사회적 담론의 스펙트럼을 크게 확장했다. 과거에는 다루기 어려웠던 사회문제, 젠더 이슈, 계급 문제 등이 문화 콘텐츠의 주요 소재로 다뤄지기 시작했다. "기생충"이나 "오징어 게임" 같은 작품들이 전 세계적 공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성숙한 사회적 담론을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한류의 진정한 힘은 민주화와 시민의식이라는 단단한 토대 위에서 발현되었다. 앞으로도 한류가 지속가능한 문화적 가치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민주적 토대와 시민의식의 더욱 성숙한 발전이 필요할 것이다.

회복하는 한류

한류의 진정한 강인함은 시련을 창조적으로 복원하는 회복력에 있다. 실제, 한류는 1990년대 말 IMF 외환위기라는 극심한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꽃피웠다. 당시 취약했던 문화산업 기반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류는 중국과 일본, 동남아시아에서 놀라운 성공을 거두며 한류의 막을 열었다.

이후 2005년부터 중국과 일본에서 등장한 반한류 정서는 또 한번의 큰 위기였다. 일부에서 제기된 문화 침략에 대한 담론은 한류의 미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한류는 현지화 전략을 강화하고 문화 교류를 확대하며 질적 성장을 이루어냈다.

위기는 오히려 한류 콘텐츠가 그 품질을 향상하는 계기가 되었다. 2016년 사드 배치로 인한 중국의 한한령은 한류가 맞닥뜨린 가장 큰 도전이었다. 하지만 이 위기는 오히려 한류의 전 지구적 확장을 추동하였다. 한류는 중국 의존에서 벗어나 글로벌 시장으로 눈을 돌렸고, 디지털 플랫폼을 적극 활용한 새로운 전략은 한류의 세계화를 가속화했다.

2020년 찾아온 코로나19 팬데믹은 공연과 대면 활동이 중심이던 한류에 큰 타격을 주었다. 하지만 한류는 다시 한번 혁신한다. 온라인 콘서트, OTT 플랫폼 활용, 메타버스 도입 등 비대면 시대에 맞는 새로운 콘텐츠로 응전했고, K-콘텐츠 스텝들이 마스크로 무장한 와중에도 드라마, 영화 제작은 계속되었다. 비대면 시대, 글로벌 플랫폼의 수요를 K-콘텐츠가 감당한 것이다.

한류의 성공 비결은 위기를 기회로 전환하는 놀라운 회복력에 있다. 끊임없는 혁신과 품질 향상, 시장 다변화 전략, 그리고 빠른 디지털 전환이 그 핵심이었다. 특히 위기 때 마다 보여준 과감한 도전정신과 창의적인 문제해결 능력은 한류를 글로벌 문화의 중심으로 이끌었다.

이제 한국의 대중문화는 단순한 문화 수출을 넘어 글로벌 문화와 소통하고 교류하는 새로운 한류 정경을 그려나가고 있다. 과거의 위기 극복 경험은 미래의 도전을 헤쳐나갈 소중한 자산이 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련 속에서도 잃지 않았던 창의성과 혁신의 정신, 그리고 세계와 소통하고자 하는 열린 마음일 것이다.

2024년 지는 해가 마지막 붉은 빛을 흩뿌리고 있다. 내일은 또 다른 태양이 떠오를 것이다. 한 낮에 찌는 더위는 우리의 시련일지라도, 우리는 다시 한번 새로운 서사를 써나가야 할 것이다. 올 한해, 긴 밤 지새우느라 고생 많으셨다. 덕분에 K-콘텐츠의 소재가 풍성해졌지 않은가. 멋지게 회복(回復)하시고, 새해 축복(柷福) 많이 받으시라. (끝)


작성일: 2024년 12월 24일

글쓴이 배기형은 1991년 KBS에 PD로 입사해 "체험 삶의 현장" "연예가중계" 등 다수의 교양 및 예능 프로그램을 제작하여 전 세계에 배급한 이력이 있다. 국제문화교류와 한류 콘텐츠 전문가로서 주요 국제기구의 총회와 콘텐츠 포럼에서 초청 연사 및 진행자로 활약했다. 문화콘텐츠학 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

[참고 미디어]

내란 사태를 위한 신속하고 근본적인 종결을 위한 민주당의 입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