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영상 형식의 시소게임: '모두 다 잇는 자' 그리고 '모조리 끊어버리는 자'…극단에 매료된 콘텐츠들

숏폼 드라마는 파편화된 몰입을 유도하는 속도 중심의 전략이고, 롱테이크 촬영 방식은 지속성 안에서 감정을 누적시키는 방식을 탐색 중이다. 이렇듯 콘텐츠 산업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숏폼 드라마와 원씬 원컷의 ‘형식의 시소게임‘은...

Bluedot Admin

이수지 | 디렉터스초이스 감독


대중이 탐하는 ‘미지의 아름다움’은 흔히 블랙으로 대변된다. 블랙홀의 실제 색은 누구도 알 수 없어 블랙으로 명명되었고, 역대 007 제임스 본드의 기본 착장은 늘 블랙 수트이다. 고급 세단 역시 블랙이 인기이며, 결혼정보회사의 VVIP 회원들은 블랙라벨로 분류된다. 이처럼 정체와 속내가 다 드러나지 않는 프리미엄들이 차지한 ‘블랙’의 의미가 욕심났던 것일까. 2016년, 인도계 영국 예술가 아니쉬 카푸어(Anish Kapoor)는 세상에서 가장 검은 도료인 ‘반타블랙(VANTA Black)’의 예술적 독점 사용권을 획득했다. 본래 군사 및 우주항공에서의 활용을 목적으로 개발된 이 검은색 하나를 두고, 예술계에는 극으로 치닫는 한바탕 소동이 일어났다.

반타블랙, 극단의 맛

가시광선의99.965%를 흡수하는 반타블랙의 초현실적 영롱함에 대적하기 위해, 또다른 영국 예술가 스튜어트 셈플(Stuart Semple)은 그 성능이 반타블랙에 준하는 Black 2.0과 Black 3.0을 개발했다. 그는 자신의 개발품을 일반이 구입할 수 있도록 내놓으면서, ‘아니쉬 카푸어와 그를 돕는 사람들은 구입할 수 없음’을 보란듯이 게시했다. 이렇게 시작된 반(反)카푸어 운동이 ‘더욱 검은색’에 집착하는 경쟁으로 심화되던 중, 2019년 미국의 MIT가 무려99.995%의 빛 흡수율을 지닌 신물질 개발 소식을 발표하고 ‘예술적 사용에 권리 제한을 두지 않음’을 선언했다. 그렇게 한동안 시끄러웠던 이 전쟁은 어느정도 가라앉는 듯 보였다.

그리고 2020년, 서구권의 지나간 알력 다툼이었던 블랙 전쟁에 다시금 불을 지핀 쪽은 일본이었다. 99.4% 흡수율을 자랑하는 ‘무소블랙’을 출시하더니 어느새 화방 어디에서나 구입 가능한 실세로 자리잡은 것이다.

반타블랙으로 제작된 아니쉬 카푸어의 작품들[1]

블랙 전쟁은 암묵적인 보편재를 독점한 행위에서 비롯된 괘씸함과 자존심 대결, 이 기싸움을 소비하는 대중들, 그리고 그 대중들을 공략하는 상업성 등이 뒤섞여 갖은 방향으로 울퉁불퉁 튀어나온 명맥을 이어갔다. 예술가들이 앞다투어 “내 검정이 네 것보다 더 지독하다”를 내세운 결과물들이 실제로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자 하였고, 또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궁금해진다. 과연 ‘앞선 경지보다 더 나아간 형식적 시도’는 창작의 주도권을 쥘 수 있는가?

최근의 영상 콘텐츠 산업에서도 극단적 형식을 추구하는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쪽에선 서사 전개를 최대한 잘게 쪼갠 세로형 숏폼 드라마가 거대 산업으로 북상 중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좁은 서사 범위를 한 줄로 이어 놓은 원씬 원컷의 넷플릭스 드라마 <소년의 시간>이 화제이다.

신생 분야인 숏폼 드라마 플랫폼들이 (마치 안개 분사 분무기처럼) 양산형 콘텐츠를 부지런히 퍼뜨리는 중이라면, 원씬 원컷 콘텐츠는 편집과 스티치 기술이 필요 없는 아날로그의 세계로 깊게 정진하는 느낌이다. 대중이 둘 모두에 호응하는 현재, ‘잘게 쪼갠 것을 얼마나 더 많이 만드느냐’와 ‘어디까지 다 이어서 만들 수 있느냐’, 양 극단의 스펙트럼은 더 넓게 벌어지기 시작했다.

숏폼 드라마 위한 시나리오?

숏폼 드라마 산업을 선점한 중국 내 ‘form’ 구분은 매우 구체적이다. 가로형 장편 숏폼 드라마(회당 5-20분)와 세로형 단편 숏폼 드라마(회당 3-5분)에 이어, 극단적으로 축소된 마이크로 러닝타임(회당 1-2분)까지 나아갔다. 이렇게 등장한 마이크로 숏폼 드라마 산업이 2024년에는 10조원 규모를 돌파하는가 하면, 미국을 비롯한 글로벌 시장 진입에도 성공해 현재는 중국의 신규 수출 산업으로 꼽히고 있다.

한국에서도 탑릴스, 숏차, 비글루 등의 숏폼 드라마 플랫폼이 런칭 되면서 작품당 평균 제작비가 약 1억-1억 5천만원으로 책정되는 시장이 형성됐다. 국내 영화와 TV/OTT 드라마 시장이 축소되고 저예산 YouTube 웹드라마를 제작하던 디지털 스튜디오들도 주춤하던 차에, 숏폼 드라마는 마치 혜성처럼 등장해 모두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한동안 오갈 곳을 찾아 헤매던 각지의 창작자들이 ‘이 시장은 어떨까?’하는 기대와 우려를 안고 몰려든 이곳에서, 숏폼 드라마를 위한 시나리오 양식이 차츰 새롭게 태어나는 분위기이다.

숏폼 드라마는 ‘다음 에피소드를 꼭 시청하도록 유도하는’ 드라마의 기본 전략이 1-2분 내 간격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구조로, 자극적인 장면과 강렬한 감정 표현이 매우 자잘하게 분포되고 있다. 국내 숏폼 드라마에 초기 진입한 주체들은 ‘약 60개 씬으로 구성된 시나리오를 쓴 다음에, (1개 씬이 1분 내외가 되도록 쓰는 게 기본적이니) 각 씬 마다 1개 에피소드로 쪼갠 영상을 편집하면 된다’고 여기곤 했으나, 실제 창작자들은 그와 다른 방식을 모색해가고 있다.

이들에게선 애초에 ‘60개 씬’이 아니라 ‘60개 에피소드’의 차원으로 접근하는 시도가 엿보이고 있다. 각 에피소드마다 짧은 충격파가 콕콕 박혀 있도록 구성하여 전통적 서사의 흐름을 파편화된 자극으로 변모시킨 독자적 스타일이 정립되는 흐름이다. 이는 콘텐츠 기획과 제작이 서사의 질에서부터 출발하기보다는, 플랫폼 사용자의 주요 취향과 익숙한 사용성(세로형의 짧은 영상을 연속적으로 시청하는)에 보다 집중된 결과일 것이다.

숏폼 드라마 시장을 선점한 중국의 콘텐츠들은 자극 추구 전략이 보다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작품의 첫 장면부터 상당한 수위의 키스나 남자 주인공의 샤워 장면이 등장하기도 하고, 이후 매 에피소드마다 베드신, 다툼, 원나잇스탠드, 명품 로고를 보란듯이 달고 등장한 재벌 캐릭터, 추행 등 자극적인 요소들이 정신없이 배치된다.

중국 숏폼 드라마 장면 예시. 첫 장면부터 별다른 설명 없이 상당한 수위의 신체 접촉이 등장한다.[2]

이를 두고 2024년 중국 국가광전총국은 숏폼 드라마의 재벌 미화, 회빙환(회귀, 빙의, 환생) 등 비현실적 소재, 선정적 장면과 폭력적 묘사를 규제하는 지침을 발표했다. 규제의 주안점은 콘텐츠의 질적 저하를 방지하는 점과 비현실적인 로맨스 판타지를 부추기지 않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를 의식한 흐름일까. 그간 웹소설 원작 IP를 주로 공급받아온 숏폼 드라마 산업계에서 프리미엄 콘텐츠 제작을 위한 변혁이 일어나는 추세이다. 아이치이(iQIYI)는 비즈니스 파트너들에게 통상적 금액보다 더 높은 제작비용을 제시(대신 아이치이에 단독 최초 공개하는 조건)하고, 플랫폼 수익 일부를 공유하는 제안을 공개하였다. 아래 내용에선 영상으로 바로 제작 가능한 시나리오를 직접 선별, 수급하려는 움직임도 함께 엿보인다.

[아이치이의 프리미엄 숏폼 드라마 개발 관련 공개 정보][3]

-제작과 각본 개발 가능한 파트너사에 제안: 제작 투자 비용 범위는 최소 40만-300만 위안(한화 약 7,500만-6억원) + 초과 수익의 30-45% 범위 내에서 수익 분배
-시나리오 공개 모집: 작품당 5만-10만 위안(약 1000만-2000만원)의 집필료 + 10-15% 범위 내에서 수익 분배(70편 이상의 에피소드, 전체 RT 110분 작품 기준)

한국의 숏폼 드라마 창작자들은 ‘아직까지 대박이 난 콘텐츠가 없기에 딱히 이렇다 할 창작 매뉴얼은 없다‘고 토로한다. 어느 순간 뾰족하게 올라와 대중의 시선을 휘어잡는 콘텐츠가 탄생하면, 그 방향성을 따라가는 콘텐츠들로 숏폼 드라마만의 새로운 문법이 정착될 시기가 올 것이다. 하지만 극도로 짧은 것이 미학만이 홀로 질주할 수는 없으리라. 반대 방향에선 장인정신을 추구하는 ‘롱테이크’의 미학이 조용히 뻗어 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롱테이크 촬영, 어디까지?

샘 멘더스 감독의 영화 <1917>는 제1차 세계대전의 작전 상황 전체를 단 2개의 숏(영화 중간에주인공이 총격전을 벌이던 중 1번의 암전으로 시간차 효과를 준다)으로 구성하여 2020년 미국과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과 각종 영화제, 비평가 협회 시상식 등에서 촬영상을 거머쥐었다. 이 영화의 서사는 하루 반나절의 흐름을 압축시킨 것으로, 그저 영국군인 주인공이 최전방에 지령을 전달하러 가는 여정을 쭉 따라가는 것만이 내용의 전부이다. 그러나 마치 전쟁터 배경의 콘솔게임을 하는 듯 숨을 조이는 긴장감이 러닝타임 내내 증폭되도록 만든 촬영 기법은, 폐허가 된 전쟁 속으로 관객을 100% 이상 흡수시키는 마력이 있다.

실제로 <1917>은 긴 덩어리의 롱테이크들을 여럿 이어 붙여 만들었다고 하니 ‘원 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이라 칭하는 것이 적합하다. 하나가 아니지만 하나처럼 보이도록 만든, 현대 영상 기술력의 총합인 셈이다. 인물 행동 하나하나의 리얼리즘을 온전히 담아놓은 이 영화의 제작진들은 ‘창작자의 의지력과 고도의 기술력이 만나면 어디까지 해낼 수 있는가’를 참으로 멋지게 증명해냈다.

영화 <1917> 개봉 이후 약 5년이 흐르고, 올해인 2025년에는 넷플릭스의 영국 오리지널 작품 <소년의 시간>이 더욱 진화한 롱테이크 연출을 선보였다. 1개 에피소드 전체를 이어서 찍은 방식(2화에 스티치가 단 1회 사용됐다)으로, 딱 4개의 숏으로만 4부작 전체를 완성한 이 작품의 제작진들은 촬영 중간에 드론을 띄우는 용기까지 겸비했다. 모든 순간을 이어 찍는 동안 카메라를 조용히 드론에 달았다가 다시 떼어내는 대단한 근력(?)이 공간 점프가 불가한 형식적 한계를 훌쩍 넘어설 정도에다가, 시간 흐름에 대한 묘사도 매우 정확하게 따져가며 연출한 것이 탁월하다.

영화 <1917>은 원컨티뉴어스 숏(one continuous shot) 기법을 활용하여 전장의 긴박함과 몰입감을 극대화한 촬영이 특징적이다.
넷플릭스의 2025년 작품 Adolescence는 각 에피소드를 하나의 연속된 촬영(one continuous shot)으로 담아내어, 관객에게 극의 몰입감을 극대화한 것이 특징이다.

인물들이 ‘앞 상황에서 몇 분이 흘렀다’고 말하는 대사들은 우리가 시청한 영상이 흐른 시간과 정확히 일치하는데, 각 인물들이 서로 말을 주고 받고 이리저리 이동하며 소요되는 시간이 똑 맞아 떨어지도록 계산해낸 집요함은  영화 <1917>도 완벽히 해내지 못한 경지이다. (영화 <1917>에는 주인공이 차량으로 이동하는 장면에서 다소 먼 거리를 이동해야 하는 것처럼 암시했음에도, 실시간으로 이동한 시간 자체는 그에 맞지 않는 오류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얼마나 길게 이어서 찍어 봤니?’의 경쟁이 아니다. 전체를 이어서 찍는다는 결정 아래, 형식이 품은 극도의 리얼리티를 어디까지 살려내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낳은 발전이다. 형식이 서사를 지나치게 압도하지도, 반대로 기능적 장치로만 소비되지도 않는 궁합을 찾아내려는 한걸음의 도약이라 볼 수 있다.

그럼에도 여전히 롱테이크 촬영에 의한 서사 표현의 제약은 존재한다. 요즘은 단순한 플롯이 대세라지만, 부수적 장치 없이 일방향으로만 빈틈없이 흘러가는 형식의 특성상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극도로 최소화된 상황이기 때문이다.

화제작 <소년의 시간>을 리뷰한 영상들에 ‘뒤통수를 이렇게 많이 본 작품은 처음이다’라며 불만을 토한 댓글이 그 한계를 정확하게 지적한다. 영화 <1917>은 주인공만을 지속적으로 따라가는 전략이지만, <소년의 시간>은 여러 인물을 교차하듯 따라가는 방식이니 카메라의 선택을 받지 못한 무수한 디테일과 감정의 순간들이 관객을 답답하게 만들 수밖에 없다. ‘우리는 저 쪽 너머에도 무슨 일이 있는지 궁금하다고!’

서사의 미래는 어디로 향할까

숏폼 드라마는 파편화된 몰입을 유도하는 속도 중심의 전략이고, 롱테이크 촬영 방식은 지속성 안에서 감정을 누적시키는 방식을 탐색 중이다. 이렇듯 콘텐츠 산업의 한복판에서 벌어지고 있는 숏폼 드라마와 원씬 원컷의 ‘형식의 시소게임‘은, 그동안 우리가 학습하고 소비해 온 서사 구조를 재설계하라며 은근한 자극을 보내고 있다. 최대한 잘게 쪼개고 자극을 나열하는 방식이든, 한 순간도 끊지 않고 이어가는 방식이든, 둘의 영역 모두는 전통적 서사와 별개로 완전히 새로운 감각과 리듬의 차원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처음의 물음으로 돌아와, ‘형식이 창작의 주도권을 가져갈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직은 고개를 끄덕일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이제 형식이 서사의 방향성과 구조를 함께 설계하는 동등한 위치에 올라섰다는 점이다. 형식이 서사의 패러다임을 바꾸고, 서사는 살아남기 위한 선택을 정교하게 다듬으며 자기자신을 다시 디자인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우리는 오랫동안 공유해왔던 창작의 기준점 자체가 옮겨가는 시기를 통과하는 중일 것이다. 하지만 인간사 그렇듯 새로움은 언젠가 하나의 관성이 된다. 그때쯤 우리는 어느 구석에서, 또다른 극단의 매력을 찾아내게 될까. (끝)

작성일: 2025년 3월 28일


필자 이수지는| 이화여대 학사, 카이스트 석사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드라마, 영화를 연출하며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는 영상 콘텐츠 기획을 연구하고 있다.



[1]https://news.artnet.com/art-world/anish-kapoor-vantablack-2391684

[2]https://youtu.be/2aBYBILRlAk?si=629btz3dXh9wUoez

[3]https://lmtw.com/mzw/content/detail/id/239477?utm_source=chatgpt.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