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선] 두툼한 '시접(始接)'이 필요한 이유– 시청자 참여형 콘텐츠에 관하여
시청자 참여가 늘수록 창작자는 더 큰 부담과 리스크를 감수해야 한다. 개입의 폭과 예측 가능성을 어디까지 열어둘지, 콘텐츠의 완성도와 참여의 즐거움 사이 균형점을 찾는 것이 핵심 과제다.
이수지 | 디렉터스초이스 감독
한복 저고리를 유심히 살펴본 적이 있는가? 벗어두었을 때는 평면 위에 납작하게 펼쳐지는 의복이지만, 우리 몸에 두르면 군데군데 적용된 곱디고운 곡선의 미학이 둥실 살아나는 매력이 있다. 전통 방식으로 지은 저고리를 요즘 세상에서 흔히 발견하기는 어렵지만, 실제 옛 사람들이 만들었던 한복 저고리에는 그들이 감내해야 했던 삶의 고달픔을 나름의 지혜로 극복한 흔적이 내재되어 있다.
우리네 조상들은 물자가 충분하지 않았던 때, 어린 아이의 저고리를 지을 적에 두 소매 안쪽으로 여유분의 시접을 충분히 남겨두었다고 한다. 아이가 입을 저고리 크기보다 넉넉하게 직사각 형태의 원단을 재단하고, 이것을 둥근 소매 아랫단 모양으로 꿰매서 조금 불편하더라도 안쪽으로 크게 접힌 시접을 유지하는 것이다.
시간이 흘러 아이가 훌쩍 자라면, 입던 저고리 원단의 몸통과 소매를 모두 해체하고 깨끗하게 세탁 후 다시 염색한다. 그리고 남겨둔 시접 크기를 조금씩 줄여 다시 바느질하는 방식으로 하나의 원단으로도 크기가 조금씩 늘어나도록, 몇 번이고 맞춤 옷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옛 조상들의 지혜
여분의 것을 두고 개인에게 맞는 커스터마이징을 일찌감치 수행했던 옛 사람들처럼, 하나의 영상콘텐츠를 내 입맛에 맞는 형식으로 그때 그때마다 늘였다 줄이면서 소비할 수 있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만약 플랫폼 내에서 특정 ‘롱폼’ 콘텐츠가 게시되었을 때 시청자가 선택한 시청 옵션에 따라 숏폼, 미드폼, 롱폼으로 각각 다르게 소비할 수 있는 기능이 제공된다면 말이다.
현재에도 누군가는 드라마 시리즈를 시청할 때 숏폼으로 게시된 낱개 장면 단위로만 소화하고, 또 누군가는 리뷰어가 요약해 둔 40분 남짓한 콘텐츠로 한 시즌 분량 전체를 이해한다. 그리고 또 누군가는 1화부터 마지막화까지 정독하듯 착실히 주행한 것이 진정한 시청이라고 여기는 세상이다.
재미있는 것은 각자의 콘텐츠 소비 방식이 다르더라도 이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대화를 나눌 땐 같은 콘텐츠에 대한 저마다의 감상을 나누는 것에 그다지 어색함이 없다는 것이다. 이럴 바에야 하나의 플랫폼 내에서 모든 소비자의 니즈를 다 만족시키는 것이 가까운 미래의 비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든다.
필자는 연출자로서, 또 연구생으로서 영상 콘텐츠의 시청자가 ‘소비하고 싶어하는 행위와 방식’에 매우 큰 관심을 두고 있다. 단순 시청 행위가 아닌 콘텐츠의 내용에 일부 관여하거나 자신의 방식대로 소비하기 위해 콘텐츠에 변형을 가하는 적극적 시청자를 감안할 때, 영상을 기획하고 창작하는 입장에서는 이러한 시청자의 요구와 영향력이 어느 영역까지 발현되도록 구조를 열어두어야 할 것인지, 또 어느 form으로 주로 소비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이 시청자를 행동하게 하는가
과거에도 TV는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전화 연결로 의견을 받거나, 반투명한 종이를 TV에 대고 그림을 따라 그리는 기획도 존재했다. 시간이 흐르자 일명 국민 프로듀서들의 ‘픽’을 요하는 서바이벌 포맷이 대세가 되고, 한 명의 시청자가 두 명에게 중복 투표할 수 있는 경우들도 등장했다. (이런 경우 보통 시청자 자신이 응원하는 1인에게 먼저 투표한 뒤, 반대로 가장 탈락 가능성이 높을 출연자에게 잔여 투표를 하는 경우가 많다. 사유는 자신이 응원하는 출연자가 압도적으로 우승할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이다.)
레거시 미디어에서 예능 분야의 주축을 담당했던 나영석, 김태호 PD 등이 동시대에 디지털 세상으로 뛰어든 흐름 이후, 그동안 TV차원에서 구상됐던 한 스푼 분량의 시청자 참여의 가능성은 보다 넓은 반경으로 확대되고 있다. 나영석 PD는 YouTube 라이브 스트리밍에서 시청자와의 직접적인 소통을 훌륭히 해내고자, 유튜버 침착맨(웹툰 작가 이말년)에게 특훈을 요청하기도 했다.
한편, 김태호PD가 이끄는 TEO에서는 시청자와의 낱개 소통보다는 시청자 반응 데이터를 정량적으로 흡수하는 양상이 짙다. 이들은 <지구마불 세계여행>을 시즌3까지 꾸준히 제작하는 과정에서 국내 여행 유튜버 3인방이 자신의 여행기 영상으로 경합을 벌이게 하고, 시청자가 반응하는 데이터(조회수와 좋아요 수)를 기준으로 우승자를 선정함으로써 시청자 참여도의 정량적 정보를 꾸준히 흡수하고 있다.



이러한 시청자 참여를 요하는 콘텐츠의 의도가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없던 수요를 만들어내고 행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는 명확한 동기부여가 필요하다. 시청자도 참으로 바쁘고 고된 일상 속을 살아가기고 있기에, 그들이 기쁨을 추구하기 위해 소비하는 엔터테인먼트 내에서 아주 약소한 수준의 액션이라 할지라도 일련의 자발적 참여행동을 요청할 때에는 시청자에게도 그만한 동기를 심어주어야 한다. 그저 재밌는 콘텐츠를 제공받는 1인으로서 가만히 보고 웃고 즐기고 싶은 와중에, ‘내가 지금 좋아요 버튼을 누르면 앞으로 어떤 게 더 즐거워지는 건데?’ 하는 무언의 의문이 들기 십상인 것이다.
시청자에게 동기를 묻다:
참여를 부르는 설계 조건
최대한 많은 시청자가 참여하게 하려면 어떻게 유도해야 할 것인가? 잠재적 참여자가 수면 밖으로 올라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며 프로그램 기획자의 의도에 맞는 참여에 기꺼이 응하면서도, 불편함이나 귀찮음 없이 자신의 참여 행위를 ‘즐거움의 일환’으로 여기도록 하려면? 기획에 앞서 이 고민의 원천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시청자의 참여 행위를 가운데에 두고 그 주위에 엉켜 있는 플랫폼의 기능성, 심리적 동기, 참여 행위에 대한 보상 여부(예, 적극적 참여자에 대한 상품 제공이나 피드백 제공 등) 등을 해체하여 분석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지구마불 세계여행>의 시청자를 대상으로 프로그램의 안내에 따라 참여한 경험에 대해 정량적 데이터를 수집, 탐색적 요인분석을 통해 시청자 참여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 결과, 시청-참여자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자신이 비교적 쉽게 접근하고 익숙하게 사용 가능한 플랫폼 내에서 참여 행위가 제시되는 것으로 밝혀졌다. 지극한 팬심이 아니고서야, 특정 출연자에게 투표를 하기 위해 새로운 어플리케이션을 설치하고, 가입하고, 매뉴얼을 익혀 투표 가능한 경로를 찾아가 한 표를 행사하기까지의 과정이 학습하듯 이루어져야 한다면 콘텐츠의 재미와 무관하게 참여 의지 자체가 발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지구마불 세계여행>은 대중에게 익숙한 유튜브 채널의 기초 중의 기초 기능으로만 집계되는 데이터를 활용했고, 시청자에게도 부담 없는 이러한 설계는 자신의 별 것 아닌 행동으로도 콘텐츠의 핵심(경합 우승자 선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자기효능감의 점수가 높게 집계되는 결과로 나타났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결과는, 시청자가 체감하는 관계의 요인이었다. 이는 같은 출연자를 응원하고, 또 같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타 시청자들과의 교류에서 발동되는 면도 존재하나 이보다 강력한 것은 시청자 개인이 무형의 콘텐츠 자체와 점차 가까워짐을 느끼는 친근감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시청자 참여 설계에서는 투명한 결과의 공개가 무엇보다 중요할 것인데, 당연지사 이 연구에서도 시청자의 참여가 콘텐츠에 반영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피드백에 관한 요인이 주요한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드러났다. <지구마불 세계여행>의 제작진은 주간별 조회수와 좋아요 수를 집계한 순위표를 공개하며, 시청자의 '좋아요' 하나가 우승자 결정에 기여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는 과정을 이행했고, 이러한 가시적인 결과는 (다음 시즌에도) 시청자의 참여를 독려하는 동기로 작용했다.
결론적으로, 시청자들은 콘텐츠 자체의 내용 외에 '나의 참여가 얼마나 쉬운지', '나의 참여가 다른 사람들 및 콘텐츠 자체와 어떤 관계를 맺어주는지', '나의 참여가 콘텐츠에 어떻게 반영되는지 인지하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다음 에피소드에서 어떻게 나타날지에 대한 호기심'에 따라 행동 개시 여부를 결정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어디까지 시청자에게 열어줄 것인가
시청자가 개입할 수 있는 영역이 넓어질수록 창작자에게 주어지는 고통과 그에 수반되어야 하는 물리적 여건은 제곱수로 불어난다. 게다가 최근의 콘텐츠들은 콘텐츠의 방영으로만 그 여파를 종결 짓지 않는다. 콘텐츠 파워로부터 파생된 주변 비즈니스들이 방영이 종료된 후에도 세상을 맴돈다. 시청자가 직접 선정 혹은 결정한 요소가 후속 사업의 핵심이 되어야 하므로, 시청자의 참여를 기본으로 안고 가야만 하는 포맷일 경우 기획자들은 담보할 수 없는 미래에 꽤나 큰 자본과 리스크를 동시에 걸어둔 채 부디 좋은 결과로 나아가길 바랄 수밖에 없다. 또 자칫하면 시청자의 참여가 콘텐츠의 진가를 훼손하는 변질될 위험 또한 배제할 수 없다.
서사물이 인터랙티비티를 추구한다면 콘텐츠의 제작 난이도는 극악을 달린다. 넷플릭스의 <블랙 미러: 밴더스내치>처럼 시청자의 선택에 따라 결말이 바뀌는 멀티 엔딩 방식은 높은 몰입감을 제공했지만, 창작자에게는 여러 가능성을 열어둔 시나리오를 거미줄처럼 엮고 또 구현해야 하는 막대한 부담을 안겨준다. <밴더스내치>의 주연 배우는 자신이 이번 Scene의 어느 버전을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헷갈린 채로, 수많은 앞 갈래에서 이어져 온 각 감정선을 종류별로 연기하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고 토로한다.
궁극적으로 창작자가 마주하는 질문은 ‘어디까지 시청자에게 열어줄 것이며, 그들의 개입 결과를어디까지 예측하고 또 대비할 것인가?’이다. 시청자와의 상호작용을 구사하되, 콘텐츠의 본질과 완성도를 지켜낼 수 있는 '적당한 선'을 찾는 것은 영원히 답을 찾아가야 하는 숙제일지 모른다.
시접의 미학:
디지털 시대 창작과 시청자 참여의 균형
단순 창작만으로도 이미 어려운데… 작가들은 어느새 이 시나리오에서 과연 어느 장면이 숏츠로 터지게 될지 고민하고, PD들은 시청자가 개입할 경우 어떠한 반응과 결과가 도출될지, 요모조모를 다 고려해야 하는 고민들에 골몰한다. 당장은 뾰족한 가이드나 누적된 노하우가 충분하지 않으니 상당히 불편하고 어려운 영역이다. 모두가 지금처럼 레거시와 디지털이 한데 얽혀 일방향과 양방향 사이, 숏폼에서 롱폼까지 모두 소비되는 구역에서 균형을 맞춰가는 과정이 처음이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들도 두툼한 시접이 들어간 저고리를 처음 입을 땐 불편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장하면서 시접 또한 점차 얇아지고, 각자의 체형에 맞는 규격으로 옷 스스로가 변모하면서 서로가 적절하게 궁합이 맞는 순간이 있었으리라. 조상들의 저고리 시접이 아이의 성장을 담아낼 수 있었던 것처럼, 태생적으로 일방향성이 강할 수밖에 없는 영상 콘텐츠도 시청자가 기꺼이 참여할 수 있는 공간을 고려하고, 그 여백에서 소통을 추구하고자 하는 흐름을 응원하는 마음이다.
레거시 멤버들이 디지털 세상으로 유입되어 펼쳐놓는 다양한 시도와 노력 또한 경험이 쌓이다 보면 고민은 줄고, 즐거움을 더하며, 나아가 창작자와 시청자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더 좋은 그림에 도달하지 않을까. 디지털을 배제할 수 없는 환경 속에서, 시청자에게 관심받는 콘텐츠는 얼마나 영리하게 시접을 계획하고 남겨두는가에 달려있을 것이라 여긴다. 당장은 옆구리가 끼어 불편한 시접이 결국 시청자의 선택과 행동을 불러내는 동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끝)
작성일: 2025년 9월 1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