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넷플릭스〈애마〉와 페미니즘 기억 정치학: 젠더, 노동, 재현의 재서사화

넷플릭스 〈애마〉의 결정적 장면은 정희란이 촬영장에서 제작자의 요구에 맞서 누드 연기를 거부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한국 영상산업의 오래된 관행 - "배우는 감독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 를 전면적으로 문제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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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숙 | 대중문화 독립연구자


서론:
리메이크, 기억, 그리고 여성의 재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애마〉(2025)는 단순한 리메이크가 아니다. 1982년 개봉한 영화 〈애마부인〉은 한국 영화사에서 금기와 해방, 검열과 욕망이라는 복합적 상징을 지닌 작품이었다. 당시 영화는 군사독재 시기의 억눌린 욕망을 은밀히 풀어주는 통로로 소비되었지만, 그 '해방'은 어디까지나 남성 중심적 환상 속의 해방이었다. 여성 배우의 몸은 사회적 욕망을 수용하는 도구로 전락했고, 영화는 여성을 '보여지는 존재'로 고착시켰다.

넷플릭스 〈애마〉는 이 기억을 다시 호출한다. 그러나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기억의 재서사화(re-narrativization of memory) 라는 형태로 작동한다. '〈애마〉'라는 이름이 호출하는 감정은 더 이상 향수가 아니라, 질문이다 - 왜 우리는 그 시절의 '애마'를 기억하는가, 그리고 왜 지금 다시 '애마'를 말해야 하는가?

이 드라마의 핵심은 여성의 신체를 소비 대상으로 다시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재현의 구조 자체를 문제시하고 전복하는 데 있다. 본 글은 〈애마〉를 페미니즘 기억 정치학(feminist politics of memory) 의 관점에서 분석한다. 즉, 드라마가 과거의 남성적 응시 구조를 어떻게 해체하며, 여성 배우의 주체성과 노동, 재현의 윤리를 어떻게 새롭게 구성하는지를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세 가지 층위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한다.

첫째, 여성주의 영화이론의 시각에서 〈애마〉가 수행하는 '응시의 전복'은 무엇인가.
둘째, 1980년대 한국 사회가 공유했던 〈애마부인〉의 기억은 어떻게 젠더화되어 있었는가.
셋째, 넷플릭스라는 글로벌 OTT 플랫폼이 이 로컬한 기억을 어떻게 다시 정치화하는가.

여성주의 영화이론과 응시의 권력:
멀비 이후의 확장

로라 멀비(Laura Mulvey, 1975)의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는 여성주의 영화이론의 기초를 놓았다. 멀비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과 알튀세르의 이데올로기론을 결합하여, 영화가 관객을 특정한 위치로 호명(interpellation)한다고 보았다. 영화는 남성 관객을 보는 주체로, 여성을 보여지는 대상으로 위치시키며, 시각적 쾌락(visual pleasure)은 이 불균형적 구조 속에서 생산된다.

〈애마부인〉은 이 구조의 한국적 구현이었다. 영화 속 여성은 욕망의 주체가 아니라, 남성 욕망의 대상으로서만 기능했다. 극 중 서사는 외도와 불륜을 다루지만, 그 내러티브는 사실상 여성의 신체를 드러내기 위한 장치에 불과했다. 멀비의 말처럼 "여성은 스크린에서 욕망의 대상이자 시각적 쾌락의 매개체로 존재한다."

하지만 멀비 이후의 페미니즘 비평은 '응시의 권력'을 단순히 폭로하는 수준을 넘어, 그것을 교차성과 주체성의 관점에서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Bell hooks는 『Black Looks』(1992)에서 응시가 인종·계급·젠더의 교차적 권력 관계 속에서 작동한다고 비판했다. 백인 남성의 응시는 식민적이고 인종화된 응시이며, 따라서 여성의 응시 역시 동일한 방식으로 구성될 수 없다.

엘렌 카플란(E. Ann Kaplan)은 "여성의 응시(female gaze)" 개념을 제안하며, 여성 관객이 능동적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전유하는 가능성을 탐구했다. 즉, '보여지는 존재'로서의 여성이 '보는 주체'로 전환되는 가능성이다.

이 이론적 발전은 〈애마〉의 해석에 결정적 단서를 제공한다. 〈애마〉의 주인공 정희란은 더 이상 '노출되는' 여성이 아니다. 그녀는 카메라 앞에서 노출을 강요받는 순간, 보여지기를 거부하며 응시의 권력을 되돌려주는 주체로 변모한다. 이 거부의 장면은 단순한 서사적 전환이 아니라, 멀비적 '남성 응시'에 대한 실천적 비판 이다.

넷플릭스 〈애마〉는 향수를 ‘비판’으로 다시 쓴다.
“내 몸은 너희의 시선이 아니라, 나의 노동이다.”
보여지기를 거부하는 순간, 응시의 권력은 뒤집힌다.

〈애마부인〉과 1980년대 한국 사회:
금기, 검열, 욕망의 정치

1982년의 한국은 군사정권의 정치적 통제가 극심하던 시기였다. 정치적 언론과 표현은 철저히 검열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에로영화는 '허용된 일탈'로 남았다. 국가 권력은 정치적 불만을 완화하고 사회적 긴장을 분산시키기 위해 '성의 대리적 방출' 을 묵인했다.

〈애마부인〉은 이런 구조 속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50만 관객을 동원한 대흥행은 당시로선 전례 없는 기록이었다. 그러나 그 흥행의 대가로 여성 배우 안소영은 '한국 최초의 누드 여배우'라는 낙인을 받았다. 대중은 그녀를 소비하면서도, 동시에 도덕적 비난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러한 사회적 기억은 이중적 구조를 가진다. 한편으로 〈애마부인〉은 검열 시대의 해방 상징으로 기억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여성의 희생 위에 세워진 '타락한 산업'으로 남는다. 즉, 이 작품은 한국 사회의 성담론이 어떻게 여성의 몸을 통해 정치화되었는지를 보여주는 문화기억적 텍스트이다.

〈애마〉는 이 이중 기억을 다시 호출한다. 그러나 그것을 단순히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 기억의 실천(critical remembering) 으로 전환시킨다.

넷플릭스 〈애마〉의 전환:
보여지기를 거부하는 몸

넷플릭스 〈애마〉의 결정적 장면은 정희란이 촬영장에서 제작자의 요구에 맞서 누드 연기를 거부하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한국 영상산업의 오래된 관행 - "배우는 감독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 - 를 전면적으로 문제화한다. 정희란은 대사로 말한다.

"내 몸을 보여주는 게 예술이라면, 그 예술은 누구의 것이죠? 나의 것인가요, 아니면 그들이 만든 욕망의 각본인가요?"

이 대사는 〈애마부인〉이 숨겼던 질문을 드러낸다. 1980년대의 '예술'은 남성 제작자들의 언어로 정의되었고, 여성 배우의 동의는 묵시적으로 전제되었다. 하지만 2020년대의 〈애마〉는 그 '동의의 허구'를 폭로한다. 관객은 더 이상 여성의 나체를 보지 않는다. 대신, 보여지기를 거부하는 주체적 몸을 본다. 이 거부는 단순한 서사의 반전이 아니라, 응시의 권력 구조를 뒤집는 시각적·윤리적 실천 이다.

Bell hooks가 말한 '저항적 응시(oppositional gaze)'는 바로 이런 행위를 가리킨다. 그녀는 흑인 여성 관객이 백인 중심의 이미지를 '다르게 보기'를 통해 저항한다고 말했는데, 정희란의 시선은 바로 그 저항적 응시의 수행이다. 그녀는 카메라를 응시하면서, "나는 더 이상 너희의 욕망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선언한다.

여성 노동과 몸의 정치학

〈애마〉의 또 다른 핵심은 여성 배우의 몸을 '노동의 현장'으로 재정의하는 것 이다. 드라마는 영화 제작 현장의 불평등한 계약 구조, 감독의 권력, 여성 배우의 협상 불가능한 조건 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이 작품은 성적 대상화의 문제를 넘어, 노동권의 문제 를 제기한다. 여성 배우의 몸은 단순히 '성적 이미지'가 아니라, 노동의 도구이자 권리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한 인터뷰 장면에서 희란은 말한다.

"내 몸은 내 노동의 일부예요. 하지만 그 노동이 존중받지 않을 때, 그건 단순한 노출이 아니라 착취예요."

이 대사는 최근 한국 영상산업의 현실과도 맞닿는다. 실제 영화 현장에서는 '계약 없는 출연', '성희롱 묵인', '감독 중심 구조' 등 오래된 불평등이 존재한다. 〈애마〉는 이 문제를 드라마 속 갈등이 아니라 산업 구조 자체의 비판 으로 제시한다.

이러한 전환은 2018년 한국 영화계의 #미투 운동, 방송 촬영 현장의 '감독 중심주의' 비판과도 연결된다. 즉, 〈애마〉는 페미니즘 담론을 개인의 경험이나 도덕의 문제가 아닌, 노동과 산업의 구조적 문제 로 끌어올린다.

기억의 재전유:
향수에서 비판으로

알바흐스(Maurice Halbwachs)는 "기억은 사회적 틀 속에서 현재적으로 재구성된다"고 말했다. 〈애마〉가 불러내는 기억은 단순히 1980년대의 향수가 아니다. 그것은 비판적 재구성의 장이다.

드라마 속에서 '애마부인'이라는 작품은 극중 영화 속 영화로 등장한다. 즉, 〈애마〉는 〈애마부인〉을 '재현의 대상'으로 삼으며, 기억의 재현(meta-memory)을 수행한다.

관객은 극 중 인물들이 옛 영화를 다시 보는 장면을 통해, 과거의 남성적 시선을 재차 경험한다. 하지만 이 경험은 '쾌락'이 아니라 '불편함'이다-그 불편함이야말로 비판적 기억의 출발점이다.

"그 시절, 벗은 건 몸이 아니라 자존심이었다"는 대사는 바로 이 기억의 재전유를 상징한다. 〈애마〉는 향수(nostalgia)를 낭만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비판적 기억(critical nostalgia) 으로 전환하여, 과거의 성적 착취를 현재의 윤리적 반성으로 변환한다.

글로벌 OTT와 로컬 젠더 정치:
플랫폼 기억의 윤리

〈애마〉가 넷플릭스를 통해 제작·배급된 점은 단순한 유통상의 문제가 아니다. 넷플릭스는 한국 콘텐츠를 세계적으로 확산시키는 동시에, 로컬 기억을 글로벌 기억의 일부로 재배치 한다.

이 과정에서 드라마는 한국의 젠더 이슈를 세계적 담론 속에 편입시킨다. 〈애마〉는 한국의 검열·성담론·산업구조라는 특수한 맥락을 배경으로 하지만, 여성 배우의 노동권, 노출 강요, 응시의 권력 문제는 보편적인 여성주의 의제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작품은 로컬 기억의 글로벌 번역(transnational translation)이자, 플랫폼 시대의 기억 정치학의 사례로 볼 수 있다. OTT 플랫폼은 단순히 콘텐츠를 유통하는 장치가 아니라, 기억의 인프라(memory infrastructure)로 기능한다. 〈애마〉는 이 인프라 속에서 한국의 젠더적 과거를 세계의 시선과 대화시키는 데 성공한다.

물론, 넷플릭스가 '페미니즘적 주체'는 아니다. 오히려 '플랫폼 제국주의(platform imperialism)'라는 비판도 유효하다. 그러나 〈애마〉는 그 구조를 전략적으로 이용하여, 한국의 젠더 기억을 세계적 담론으로 이동시키는 정치적 실천을 수행한다.

결론:
기억을 다시 쓰는 여성, 재서사화의 정치

〈애마〉는 단순히 '리메이크'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을 다시 쓰는(re-writing of memory) 정치적 행위다.〈애마부인〉이 남성 응시의 쾌락을 제도화 했다면, 넷플릭스 〈애마〉는 그 응시를 거부하고 되돌려보며, 여성의 주체성과 노동의 존엄을 복원한다. 원작의 향수가 비판으로, 대상화가 주체화로, 상품이 노동으로 전환된다.

결국 〈애마〉는 한국 사회의 젠더 기억 구조를 재조명하는 페미니즘적 거울이다. 그것은 과거의 폭력적 기억을 침묵 속에 묻지 않고, 현재의 언어로 다시 발화하는 시도이자, OTT 시대의 글로벌 기억 재편의 실험이다.

〈애마〉가 제기하는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보여지는 것은 누구의 권리인가?
기억되는 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이 질문에 대한 응답을 찾아가는 과정-그것이 바로 페미니즘 기억 정치학의 시작이다. (끝)


작성일: 2025년 11월 1일

필자: 박미숙

박미숙은 한국 대중문화와 플랫폼 시대를 연구하는 독립 문화연구자이다. 영국과 한국을 오가며 대중문화에 대해 공부했다. 그의 연구 관심은  초국적성, 텔레비전 드라마, OTT 시대의 한류와 플랫폼 제국주의, AI와 대중문화의 교차 지점에 놓여 있다. 또한 최근 텔레비전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를 중심으로 한 집단기억 연구, 넷플릭스 <오징어 게임> 등 글로벌 OTT 콘텐츠 분석, 그리고 인공지능 기술이 문화 생산과 소비, 팬덤, 저작권 개념을 어떻게 재편하는가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왔다. 그의 글은 온라인 비평 매체에도 발표되며, 비평적 시선으로 드라마, 예능, 플랫폼 산업을 분석하는 글을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현재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연구와 집필을 병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