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능비평] "진화를 부탁해!".. JTBC <냉장고를 부탁해>의 극적인 부활
새 시즌 <냉부해>는 <흑백요리사>의 흐름을 이어받아 안정적으로 부활했고, 유튜브를 통한 피드백과 캐릭터 중심 서사로 시대 감각을 반영했다. 그러나 과거의 폭발적 인기에 비해 반등의 결정적 계기가 부족하며, 향후 진화를 위한 새로운 시도가 필요하다는 점이 제기된다.
이수지 | 디렉터스초이스 감독
JTBC <냉장고를 부탁해>가 다시 돌아온 지 어느덧 10개월이 흘렀다. 2019년 11월을 마지막으로 약 5년간의 방영을 마무리한 이후, 도통 소식이 없던 <냉장고를 부탁해(이하 ‘냉부해’)>가 넷플릭스 오리지널 <흑백요리사> 붐을 타고 2024년 12월에 재개됐다. 모두가 그새 잊고 지냈던 요리 예능에도 다시금 불씨가 붙으려나 싶던 때, 2025년 10월 6일 방영된 추석 특집편에 현직 대통령 내외의 출연분이 등장하면서 시청률이 종전의 4배 이상 치솟는 성과를 냈다.
냉장고가 돌아왔다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 버전의 <냉부해>에서는 한 차례 호시절을 누렸던 키워드들이 여럿 발견된다. ‘15분‘, ’요리대결‘, ’스타의 냉장고 공개‘, ‘MC 김성주’, ’최현석‘, ’김풍‘ 등 과거 <냉부해>를 지탱했던 요소들 상당수는 현재의 <냉부해>에도 그대로 유지되고 있으며, 5년 만의 새 시즌이라고 하기가 무색할 만큼 프로그램의 포맷 표면은 거의 동일한 모습을 취하고 있다.
하지만 무언가가 묘하게 다르다. 마치 한창 즐겨 입던 재킷이 어느 날 옷장 구석 끝에 들어간 것을 잊고 지내다가, 몇 차례의 계절이 지나 다시 발견하고는 신나게 걸쳐봤을 때처럼 말이다. 이미 새 옷이 아닌데도 괜히 새 옷 같아 반갑고, 그 사이에 지나간 유행을 따라 새롭게 장만했던 다른 아이템들과도 섞어보는 재미가 있는… 내적 진화를 꾀하고 나타난 <냉부해>에서는 ‘컴백’보다 ‘부활‘의 뉘앙스가 보다 진하게 풍긴다.
승부에서 케미스트리로
필자는 지난 2024년 10월에 작성한 KIWI 칼럼에서, 아래의 문단으로 내용을 마무리한 적이 있다.
과거 쿡방이 누리던 전성시대를 기억하는가. 수많은 쿡방들이 시절 인연처럼 우리 곁을 스쳐 갔지만, 그때마다 우리에게 잔상처럼 남은 굵직한 캐릭터들은 여전히 그 향수 속에 잔류한다. 코로나의 위협을 통과한 현재의 우리 앞에 쿡방 시대의 조짐은 재도약을 꿈꿀 수 있을까. 이 흐름 속엔 한 명의 ‘비빔 인간’이 여태껏 해 온 요리가 아닌 새로운 한국 요리를 선보이겠다는 울림으로 쥐어 낸 지분이 존재한다. 쿡방의 시대가 새롭게 열릴 것이라면, 이전의 성공 문법과는 분명히 달라야 할 것이다. 시절은 흐르지만, 시대가 구(求)하는 캐릭터는 남는 세상에서, "흑백요리사" 이후에 생겨날 역사는 또 어떠한 캐릭터를 탄생시킬 것인지… 기대 한 덩이와 우려 한 스푼, 호기심 한 줌을 비빈 속내 한 그릇을 조심히 내어본다.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 <냉부해>의 귀환은 이 질문에 실질적인 답을 내놓은 셈이 되었다.
<냉부해>는 여전히 같은 조리대에서 15분간 펼쳐지는 요리 대결 룰을 유지하고 있지만, 이전 시즌의 중심이 ‘승부의 재미’에 맞춰져 있었다면 새 시즌에서는 각 셰프의 ‘캐릭터성 분산’과 그들 간의 ‘케미스트리’를 강조한다. 이전 시즌에서는 이연복, 최현석처럼 명확한 캐릭터 몇몇이 프로그램 전면에 서 있었지만, 현 시즌에서는 특정 인물의 ‘간판성’보다 여럿이 형성하는 관계의 리듬이 프로그램을 이끌어 가는 것이다.
한 두 명의 셰프에게 쏠렸던 스포트라이트가 더 고르게 분배되는 것은 프로그램의 입장에서도 인물 중심 리스크를 분산시킬 수 있는 좋은 전략이기도 하다. 필시 사람이 가장 주요한 재료가 되는 산업에서 가장 큰 위험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사람의 변수에 달린 것이기에, (이는 지극히 사견의 서술이지만) 필자는 특히나 포맷 파워를 스타성에 기대어 가는 구성을 선호하지 않는다. 과거 <냉부해>에 출연했던 셰프들 일부도 구설수나 각종 사건에 휘말린 내역이 있는 만큼, 전문 매니지먼트로 관리되지 않는 대상이면서도 사실상 ‘연반인(연예인+일반인의 합성어)’이 된 셰프들을 줄줄이 태우고 순항하기란 여간 쉬운 일이 아닐테다.
현재의 <냉부해>가 <흑백요리사>의 바통을 적극적으로 이어받은 것은 여러 방면에서 이득이다. <흑백요리사>에 출연한 셰프들 중 몇몇이 대중이 내리는 매를 호되게 맞고 뒤안길로 조용히 사라진 후… 사회적 필터를 거쳐 ‘문제 없음’을 검증 받은 뉴페이스들이 <흑백요리사>에서 이미 한 차례 캐릭터화 되고, 게다가 카메라 앞에서의 트레이닝까지 어느 정도 마쳐진 상태로 정확히 선별되어 있으니 <냉부해> 입장에서는 매우 경제적인 기획개발이 가능한 상황이다.
이를 방증하듯 새 시즌 초반의 <냉부해>는 차라리 “흑백요리사를 부탁해”라고 명명하는 게 맞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흑백요리사>의 잔향을 짙게 풍겼다. <냉부해>의 기존 출연자(OB)와 <흑백요리사> 출연자(NB)를 구분해 대결 구도를 형성하기도 하고, 프로그램 진행 중에도 “흑백요리사”라는 단어가 수시로 언급됐다.
그래도 시간이 약인지, 곧 <냉부해>는 <흑백요리사>의 흔적을 휘발시키고 자신만의 공기를 다시 복원하는 데에 성공했다. <흑백요리사>에서 ‘요리하는 돌아이’로 통했던 윤남노 셰프는 <냉부해>에서 ‘불안핑(대결 중 자주 우왕좌왕한다는 의미)’으로 회자되고, 마찬가지로 <흑백요리사>의 우승자 ‘나폴리 맛피아’ 권성준 셰프는 <냉부해>를 통해 ‘아기 최현석(최현석 셰프의 장난스러운 허세 퍼포먼스를 선망하고 추구함)’ 캐릭터를 부여받았다. <냉부해>가 <흑백요리사>보다 느슨한 유쾌함이 허용되는 공간이다 보니, ‘나폴리 맛피아’가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머문 기한은 1년 반 남짓임을 드러내며 유머거리로 삼기도 했다.


이처럼 일부 편중된 캐릭터의 존재감이 포맷 전체의 톤을 결정짓지 않도록, 새로운 <냉부해>는 힘의 분배, 균형감과 조화에서 비롯된 평화와 재미를 추구한다. 일요일 저녁 9시, 끝나가는 일주일이 가장 아쉬울 시간에 편성된 이 프로그램에서는 승패와 순위를 가르는 긴장감보다 조리대에 나선 두 명의 셰프가 이루는 two shot의 공기를 변주를 조명한다.
스타성과 실력이 가장 높은, 실질 경쟁 상대인 두 양식 셰프들(최현석, 손종원)에게 생경한 초밥 요리 대결을 맡기기도 하고, 외모가 수려하고 우아한 퍼포먼스가 특징인 파인다이닝 셰프 손종원을 ‘엘리트 왕자님’으로, <냉부해>에서 가장 시끌시끌하고 나이브하지만 놀라운 실력을 지닌 작가 김풍을 ‘말괄량이 여주’로 포지셔닝하여 둘의 브로맨스를 강조하기도 한다.
그 외에도 최현석의 생각을 꿰뚫어본 듯 그의 레시피를 줄줄이 예견하는 윤남노, <흑백요리사>에서는 우승을 도왔으나 <냉부해>에서는 여러 사람에게 패배만 안겨주는 권성준의 저주받은 프라이팬(일명 ‘실비아’), ‘얼렁뚱땅 만든 요리로도 전문 셰프들을 이기는 김풍이 두렵다’는 뜻의 ‘공풍증(공포증+김풍)’을 앓는 셰프들 등… <냉부해>는 시청자에게 학습시킨 셰프의 캐릭터성과 그들의 관계로부터 자연스레 삐져나오는 에너지들을 차츰 ‘서사화’하고 있으며, 그 작업은 유튜브를 주 무대로 한 2차 창작물로 게시해 반복 시청 효과를 톡톡하게 보고 있다.



진화를 위한 다음의 전략은?
새 시즌의 <냉부해>는 <흑백요리사>가 펼친 프레젠테이션을 도움닫기로 딛은 출발점도 안정적이었고, 과거 시즌에서는 부재했던 유튜브로부터 시청자의 피드백을 흡수할 수 있는 창구도 참 성실하게 활용했다. <흑백요리사>의 공개 스케줄을 꾸준히 따라가며 과거 <냉부해> 방영분 DB를 유튜브 무대로 이관하는 과정 속, 대중들이 오래 향수하는 포인트가 매력적인 ‘캐릭터’에 있음이 파악된 것도 한몫 했으리라 본다.
방송사가 주도했던 쿡방의 전성기가 지난 후에, 유튜브에는 ‘배우는 레시피’, ‘구경하는 레시피’, ‘소리 없는 먹방’, ‘대식가의 먹방’ 등 우리의 식생활을 둘러싼 각종 콘텐츠들이 지난 쿡방의 자리를 대체하고도 범람한 지 오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모두가 숨죽인 쿡방에 다시 도전장을 낸 <냉부해>가 요리를 보여주는 방식을 재편하는 것보다 캐릭터와 서사에 힘을 싣는 결정은 유효했다고 본다.
포맷을 크게 뒤집지 않고도 시선과 배치를 약간만 달리해 시대가 요구하는 감각을 맞추려 했고, 셰프들에게 승부처가 아닌 세계관을 부여하는 전략이 종합된 결과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익숙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차이’가 느껴지는 효과로 표출된 게 아닐까.
하지만 과거의 명성에 비해 아직 ‘대박’으로 감지되는 폭발력은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운 지점이다. 본방 사수가 어려운 세상임을 감안하고 꽤나 괜찮은 시청률이 유지되고 있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결정적 반등 포인트가 부재한 장막을 뚫고 가야 할 것이다. <냉부해>가 최초로 등장했던 파일럿 시기에는 이런저런 포맷 테스트로 인한 엉성한 시기가 휘릭 지나갔고, 포맷 구성이 안착된 이후 수년간 방영을 유지한 기록이 있다.
지금의 <냉부해>도 높은 안정성을 탑재하고는 있지만, 진화의 시기가 도래할 때에는 어느 정도 흔들릴 용기가 필요할 것이라 예상한다. <냉부해>의 오랜 시청자로서 새 시즌의 안정적 부활과 세계관 형성의 효과로 약 1년 남짓 꾸준한 성과를 내온 것에 박수를 보낸다. 다만 부활 다음의 국면에서는, 완만한 유지보다 드러난 진화를 위한 한 차례의 진동이 더 반가울지도 모르겠다.(끝)
작성일: 2025년 10월 20일
참고자료: "흑백요리사"가 만난 "냉장고를 부탁해"... 시대가 원하는 비빔 인간, 경계를 넘어선 캐릭터의 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