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K드라마 '은중과 상연': 극한 경쟁 사회가 만든 생존자들의 초상...드라마가 아닌 다큐로 보다
'은중과 상연'의 진정한 가치는 시청자들에게 개인적 경험의 검증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에 겪었던 불합리한 상황들이 정말로 문제적이었음을 확인받고,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려 했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홍지영 | 남네바다 주립대학교(CSN) 커뮤니케이션학과 겸임교수
한국 사회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경쟁이 시작되는 곳이다. 산부인과 병동에서의 출생 순서부터 시작해 입시, 취업, 승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단계가 제로섬 게임의 연속이다. 특히 여성 직장인들이 마주하는 현실은 더욱 가혹하다. 제한된 자리를 두고 벌이는 경쟁에서 때로는 나르시시즘적 성향이 생존 전략이 되어버리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다.
'은중과 상연'이 특정 계층에서 폭발적 공감을 얻고 있는 현상은 바로 이런 사회 구조적 배경을 반영한다. 이 드라마를 열광적으로 시청하는 30-40대 고학력 여성들은 상연과 같은 인물들을 단순한 픽션이 아닌 현실의 기록으로 받아들인다. 그들에게 이 작품은 오락이 아닌 사회적 증언이다.
특정 계층만 눈치 채는
독성적 관계 정밀 묘사
한류 드라마의 글로벌 성공 공식 중 하나는 보편적 감정에 기반한 폭넓은 공감대 형성이었다. 그런데 '은중과 상연'은 정반대 전략을 택했다. 극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특별한 생존 기술을 습득해야 했던 구체적이고 제한적인 시청자층을 겨냥한 것이다.
이 작품이 해당 계층 사이에서 화제가 되는 이유는 단순하다. 치열한 경쟁 환경에서 마주쳤던 그 독특한 유형의 인물들—겉으로는 피해자인 척하면서 교묘하게 타인을 조종하는 이들—을 너무나 생생하게 재현했기 때문이다. 시청자들이 매 에피소드마다 과거의 특정 인물들을 떠올리며 "이거 완전 실화잖아"라고 반응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드라마의 힘은 공감에서 나온다. 시청자가 자신의 경험과 연결지을 수 있을 때 몰입도는 극대화된다. '은중과 상연'은 바로 이 지점에서 특정 집단에게 강력한 경험을 선사하면서, 동시에 다른 집단에게는 접근 장벽을 만든다.
애착 이론으로 본 상연:
모성 결핍이 만든 생존 본능
정신분석학자 존 볼비(John Bowlby. 1958)의 애착 이론은 상연이라는 캐릭터를 이해하는 첫 번째 열쇠를 제공한다. 상연의 모든 문제적 행동 뒤에는 어린 시절 형성되지 못한 안정적 애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져 있다.
상현의 어머니 윤현숙 선생님은 분명 도덕적으로 훌륭한 인물이지만, 애착 이론 관점에서는 이상적인 양육자가 아니었다. 지나친 '공정함'으로 인해 상연은 자신이 엄마에게 "특별한 존재"가 되지 못했다고 느꼈을 것이다. 상연이 스위스에 보낸 편지에서 "엄마는 너무 공정했다"고 쓴 것이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정서적 방임 경험은 상연의 성인기 행동 패턴을 결정했다: 작품 도둑질/표절은 나르시시스트로서 행한 직장에서의 생존 전략이었다. 자신만의 안전기지가 없었던 상연에게는 사회적 성공이 유일한 생존 수단이었고, 그 과정에서 타인의 것을 빼앗는 행위도 마다하지 않았다. 조작적 관계 형성은 가족의 무조건적 사랑을 경험하지 못한 결과였다. 타인의 사랑과 관심을 얻기 위해 어떤 수단도 정당화하는 내면화된 작업 모델이 형성된 것이다.
나르시시즘 관점에서 본 상연:
독성적 관계의 설계자
하지만 애착 이론만으로는 상연의 행동을 완전히 설명할 수 없다. 그녀의 행동 패턴에는 전형적인 나르시시스트적 특성이 뚜렷하게 나타난다:
①권력 욕구와 우월감: 초등학교 때부터 교사가 부여한 권한으로 친구를 때리는 행위에서 타인에 대한 지배욕을 학습했다. "머리가 좋으니"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고 도덕적 기준을 자의적으로 적용하는 선민의식을 보인다.
②공감 능력의 결여: 은중의 고통이나 입장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며, 타인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취급한다.
③교묘한 심리전과 현실 속 트라우마의 재현 : 상연의 독이 가득한 행동은 단순한 악역의 차원을 넘어선다. 많은 여성들이 사회생활에서 한 번쯤 마주쳤을 법한 패턴들—선량함을 악용하는 기술, 피해자 코스프레를 통한 동정심 유발, 관계에서의 미묘한 주도권 장악—을 정교하게 구현한다.
특히 직장에서 경쟁과 성과에 노출된 고학력 여성들에게는 이런 인물들과의 거리 두기가 생존 전략이 되어왔다. 너무 가까워지면 피해를 입고, 너무 멀어지면 뒤에서 험담의 대상이 되는 미묘한 균형을 유지해야 하는 상황. 이런 현실적 경험이 있는 시청자들에게 상연의 행동은 낯설지 않은 패턴으로 인식된다.
현실에서 이런 사람들을 피해가며 살아온 이들에게 드라마는 일종의 검증 과정이 된다. "내가 겪었던 그 상황이 저런 것 이었구나"라는 것을 드라마를보며 확인을하고 공감을 주는 과정이 형성된다.
한국 사회의 거울:
경쟁 구조가 만든 괴물
① 사회문화적 맥락의 중요성 : 한류 콘텐츠의 강점은 개인의 심리를 사회문화적 맥락과 연결해 해석하는 능력에 있다. 상연은 단순한 애정 결핍을 가진 인물이 아니라, 한국 사회의 극심한 경쟁구조가 만들어낸 후천적 나르시시스트적 인격의 전형이다.
상대적 박탈감과 열등감을 우월감과 지배욕으로 보상하려는 심리. 암에 걸렸다면 빌딩을 주겠다는 이만큼의 돈으로 보상하는데 너가 안돌아보고 버티겠니라는 오만, 예쁜 외모를 이용해 피디와 사귀면서 회사문제를 해결하는 이런 문제적 행동을 가리는 전략은 현대 한국 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흔히 보인다고 정상이라거나 용서할 수 있는 행동이라는 것은 절대 아니다.
②은중의 성숙함 '안정적 애착의 힘' : 드라마의 또 다른 성공 요소는 은중이라는 캐릭터를 통해 보여주는 안정형 애착의 특징이다. 상황을 파악하고 조용히 물러서는 선택, 상학과의 관계를 정리하는 결단력은 안정형 애착이 스트레스에 직면했을 때 보이는 성숙한 대처 방식이다.
은중과 상연의 대조는 안정적 애착과 불안정한 애착의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주며, 같은 상황에서도 애착 패턴에 따라 전혀 다른 대응을 보인다는 심리학적 통찰을 제공한다.
③이중 구조의 해석 '이해와 비판의 균형' : '은중과 상연'의 진정한 가치는 상연이라는 인물을 단면적으로 재단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애착 이론 관점에서 상연은 근본적인 정서적 안전기지를 갖지 못한 채 성장한 상처받은 인간이다. 그녀의 문제적 행동들은 결국 생존을 위한 본능적 반응이었다고 볼 수 있다. 나르시시즘 관점에서 상연은 체계적으로 타인을 착취하는 독성적 인격이다. 타인의 선량함을 이용하는 기생적 관계 형성, 감정적 조작을 통한 지속적 통제와 착취는 명백히 비판받아야 할 행동이다.
이 두 관점은 상호 배타적이지 않다. 오히려 결핍이 어떻게 독성으로 변화하는지, 피해자가 어떻게 가해자가 되는지를 보여주는 복합적 구조를 형성한다.



한류의 새로운 방향:
세분화된 타겟팅의 실험
기존 한류 드라마들이 가족애, 로맨스, 성공 신화 등 문화적 경계를 넘나드는 보편적 주제로 아시아 전역에서 사랑받았다면, '은중과 상연'은 정반대 길을 선택했다. 매우 구체적인 사회적 배경과 교육 수준, 경험을 가진 계층의 이야기에 집중한 것이다.
이는 아시아 시장에서의 반응에도 영향을 미친다. 최근 중국의 숏폼 콘텐츠 소비 패턴을 보면, 주요 시청층이 바쁜 일상 속에서 잠깐의 휴식을 찾는 중소도시 거주자들이라는 분석이 있다. 반면 '은중과 상연' 같은 작품은 3040 여자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한 여성들의 특정한 사회적 경험을 전제로 한다.
결과적으로 이 드라마는 현재의 한국 사회, 그 중에서도 특정 계층의 경험을 반영하는 매우 시의적인 작품이 되었다. 서구 시장에서는 문화적 맥락의 차이로, 아시아의 다른 지역에서는 아직 해당 경험층의 규모 제한으로 인해 광범위한 공감대 형성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것이 약점은 아니고. 오히려 콘텐츠 시장의 세분화 트렌드를 반영하는 선구적 실험으로 볼 수 있다.
콘텐츠 진화 새로운 패러다임
개인적 카타르시스 & 사회적 검증
'은중과 상연'의 진정한 가치는 시청자들에게 개인적 경험의 검증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 과거에 겪었던 불합리한 상황들이 정말로 문제적이었음을 확인받고, 그런 관계에서 벗어나려 했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재확인하게 된다.
많은 시청자들이 정신적으로 소모적이면서도 끝까지 시청하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상연과 같은 인물들의 행동 패턴을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은중의 대응 방식을 통해 건강한 경계 설정의 중요성을 재학습하는 과정이다.
한류의 미래: 세분화와 전문화
이 작품은 한류 콘텐츠가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이다. 모든 이에게 어필하려는 전략에서 벗어나, 특정 집단의 구체적 경험을 깊이 있게 다루는 방향으로의 전환이다.
비록 시장 규모는 제한적일 수 있지만, 해당 타겟에게는 그 어떤 콘텐츠보다 강력한 몰입감을 선사한다. 이는 넷플릭스 초기에 기대했던 다양성과 전문성의 구현이기도 하다. 범용적 매력보다는 특화된 깊이를 추구하는 콘텐츠 생태계의 성숙을 의미한다.
앞으로 한류는 더욱 다양하고 세분화된 이야기들로 구성될 것이다. '은중과 상연'은 그 변화의 선두주자로서, 특정 집단의 경험을 진솔하게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는 한류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실험이자 성과라 할 수 있다. (끝)
참고문헌
Bowlby, J. (1958). The nature of the child's tie to his mother. The International Journal of Psychoanalysis, 39(5), 350–37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