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평] 서바이벌 포맷에 갇힌 정통 무용의 실험: '혁신'과 '모순' 사이의 위태로운 '스테이지 파이터'
64명의 무용수가 벌이는 잔혹한 계급 경쟁이라는 기획에서 필자는 정통 무용 위에 드리운 "프로듀스 101"의 진한 그림자를 봤다. "프로듀스 101" 스타일의 서바이벌 형식과 정통 무용의 만남은 신선한 재미보다는 시청자의 피로감을 유발하고 있다...
이소윤 | 시카고대 사회학과 박사과정
최근 엠넷의 새로운 댄스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테이지 파이터'가 화제다.
필자 또한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서 "스트릿 맨 파이터", 그리고 "스트릿 걸스 파이터" 로 이어지는 엠넷의 댄스 서바이벌 시리즈를 관심 있게 시청해 왔고, 2023년에 방영된 "스트릿 우먼 파이터 시즌2"의 경우 서울과 부산 공연을 모두 관람할 정도로 애정을 가지고 응원했었다. 그리고 올해 9월, 엠넷은 "스트릿 맨 파이터 시즌 2"가 나올 것 이라는 예상과 달리 발레, 한국무용, 그리고 현대무용을 주제로 한 "스테이지 파이터"를 내놓았다.
방송의 힘은 역시 컸다. 스테이지 파이터 출연자 중 단연 압도적인 실력과 화제성을 자랑하는 최호종 무용수의 경우 대중에게 눈도장을 확실히 찍었다. K-콘텐츠 미션의 일환으로 진행된 "기생충" 무대 개인 영상이 11월 8일 기준 업로드 약 9일 만에 65만 뷰를 넘겼고, 최호종이 참여하는 제 4회 SAL기획 공연 BETA는 오픈과 동시에 전석이 매진되었다. 뛰어난 외모, 무용 커리어, 실력 등으로 화제가 된 참가자들을 여럿 배출한 만큼 출연진들의 향후 활동이 국내 무용계의 대중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될지 기대가 되는 부분이다.
그렇지만 그 뿐이다. 무용계 계급 시스템의 피상적인 차용만이 있을 뿐, 세 무용 장르의 본질에 대한 이해나 존중은 찾아보기 힘들다. 체력 및 파워 위주의 평가 기준, 무용수들의 움직임과 전체적인 안무의 흐름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하는 카메라 워크, 무례한 방식의 캐스팅 교체 등은 과연 제작진이 정통 무용의 대중화와 “K-무용”의 해외 진출이라는 기획 의도에 걸맞은 깜냥을 갖추었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스테이지 파이터 속에서는 누가 무엇을 위해 싸우고 있는가? 그간 엠넷의 여러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또 분석해 온 케이팝 연구자의 시선에서 몇 자 적어보고자 한다.
'프로듀스 101' 그림자
64명의 무용수가 벌이는 잔혹한 계급 경쟁이라는 기획에서 필자는 정통 무용 위에 드리운 "프로듀스 101"의 진한 그림자를 봤다. 지금까지 유튜브, X, 인터넷 커뮤니티 등을 통해 모니터링한 시청자 반응을 대략적으로 종합하여 봤을 때, "프로듀스 101" 스타일의 서바이벌 형식과 정통 무용의 만남은 신선한 재미보다는 시청자의 피로감을 유발하고 있다.
"프로듀스 101"은 정(正)이 되어버렸고, 이에 대한 반(反)은 단순히 소재의 변화가 아니라 테제의 변화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역사는 2016년 첫 시즌이 방영된 "프로듀스 101"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프로듀스 101" 시리즈는 분명 아이돌 산업과 서바이벌 프로그램의 패러다임을 바꾸어 놓았다.
"프로듀스 101"의 대성공 이후 케이팝 팬들은 ‘국민 프로듀서’라는 이름으로 아이돌의 기획, 육성, 그리고 활동 방향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업계 내의 주요 행위자로 떠올랐다. 실력에 따라 A부터 F까지 매겨지는 등급, 매 투표마다 바뀌는 연습생들의 순위, 내 손으로 내가 원하는 아이돌 그룹을 뽑는다는 효능감과 판타지. 요즘 말로 도파민으로 가득한 프로그램이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로 우후죽순 등장한 유사한 서바이벌 프로그램들로 인해 "프로듀스 101"은 기성화 되었고, 최근 아이돌 서바이벌 프로그램 중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낸 프로그램은 그룹 제로베이스원(ZB1)을 배출한 보이즈 플래닛(2023) 이외에는 크게 없어 보인다.
새로운 이야기
"프로듀스 101"은 개인이 노력을 거듭하여 성장하고, 마침내 꿈을 이룬다는 고성장 시대의 성공 신화를 반복적으로 적나라하게 보여줌으로써 오히려 저성장 시대와 N포세대 담론 속 ‘꾸준한 성장’이라는 판타지를 성공적으로 그려냈다. 그러나 이제는 새로운 서사 구조와 판타지가 필요한 시점이다. 스테이지 파이터 제작진이 노골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계급’이라는 키워드가 과연 그것일까?
6화까지의 내용을 기준으로 했을 때 제작진이 많은 시간을 할애해 보여주고 있는 계급 간 평가나 계급 이동식은 계급 이동의 판타지를 성공적으로 연출하기보다는 그저 "프로듀스 101"에서 익히 보아 왔던 순위 발표식의 무용 버전으로 느껴진다. 시시각각 변하는 무용수들의 계급과 역할 또한 흥미진진하다기보다는 오히려 번잡스럽게 느껴지며, 몰입을 방해하고 있다. 특히 상반기 최고의 화제작 "흑백 요리사"는 출연진에게 ‘흑수저’와 ‘백수저’라는 고정된 계급을 부여한 후 그들 간의 다양한 대결 구도를 통해 계급이라는 소재를 입체적으로 다루어 냈다는 점에서 스테이지 파이터 속 계급의 묘사는 더욱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이에 더해 "프로듀스 101"은 시청자들이 이미 그 구조나 생리에 익숙한 ‘아이돌’을 직접 만들어 간다는 뚜렷한 소구점과 목표 지점이 있었던 반면 (순위 조작과 기타 윤리적인 문제는 잠시 논외로 하더라도), 스테이지 파이터는 글로벌 댄스 컴퍼니 입단이라는 다소 낯선 목표 지점을 가지고 있다. 글로벌 댄스 컴퍼니 입단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며, 선택된 무용수에게는 어떠한 기회가 될 수 있는지 방송에서 한 번 짚어주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과적으로 보면 경쟁을 위한 경쟁 속에 경쟁의 의도와 목적이 묻혀버린 꼴이 아닌가?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성공이 개인이 아닌 팀 단위의 경쟁, 여성의 우정과 연대라는 안티테제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듯 보였기에 더욱 아쉽다.
아닌 건 아니다
"스테이지 파이터" 곳곳에서는 케이팝의 흔적이 느껴진다. 미션 음원에 키스 오브 라이프, (여자)아이들 미연, 피원하모니, 태민 등 유명 케이팝 아이돌이 참여했고, 댄스 필름의 촬영 구도나 편집 방식 또한 케이팝 뮤직비디오를 연상케 한다. 이것이 최선이었을까? 케이팝과의 접점을 만드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접근법의 타당성에 의문이 들 뿐이다.
케이팝 안무에서는 가사의 직관적인 표현, 순간적으로 관객의 시선을 끌어오는 표정과 제스처, 따라 하기 쉬우면서도 기억에 남는 후렴구의 포인트 안무가 중요하다. 주어진 컨셉에 따라 여러 장르를 섞는 것이 일반적이며, 최종 안무는 대부분의 경우 여러 안무가에게 받은 시안 중 좋은 부분을 골라 합치고 다듬는 방식으로 탄생한다.
케이팝 안무 창작의 논리를 왜 굳이 메가 스테이지 미션에 적용했는지가 의문스럽다. 발레와 현대 무용, 한국 무용에 대한 시청자들의 이해가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세 장르를 섞다 보니 각 장르의 특성이 희석되고 부각되지 못하는 장르가 생겼다. 게다가 타 장르의 안무를 소화하기 위해 부상까지 무릅써야 하는 오디션의 진행 방식 또한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렵다.
스테이지 파이터의 출연진들은 데뷔 후 어떤 컨셉을 소화해내야 할지 모르기에 최대한 다양한 안무 스타일에 자신을 카멜레온처럼 맞출 수 있어야 하는 아이돌 연습생이 아니다. 이들은 엄연한 프로 무용수로서 자신이 속한 장르 내에서 자신만의 안무 스타일을 정립하며 경력을 쌓아온 사람들이고, 이들에게 왜 도전이나 경쟁이라는 미명 하에 무리한 오디션을 강제해야 하는가?
무용수와 케이팝 아이돌이 만들어지는 과정에 유사함이 있는 것도 사실이나, 스페셜리스트와 제너럴리스트 사이에는 차이가 있는 법이다. 무용수에게 우리가 케이팝 아이돌에게 기대하는 소위 육각형 인재상을 들이댈 이유는 하등 없다.
여러 아쉬움
나는 제작진이 케이팝과의 접점을 가져가고 싶었다면 음악보다는 사람의 측면에서 접근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이제는 하나의 브랜드이자 장르가 된 스트릿 댄스 시리즈의 명맥을 이어가지만, 스테이지 파이터의 차별성을 좀 더 각인시키기 위해서는 MC에도 변화를 줬어야 한다고 본다.
물론 실제 섭외 과정이나 출연진의 스케줄 조율 과정을 보지 못한 시청자의 입장에서 편하게 하는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한예종 무용과 출신인 전 엠블랙(MBLAQ) 멤버 이준이나 현대무용을 전공한 것으로 알려진 빅스(VIXX)의 엔 (본명: 차학연)처럼 무용계와의 접점 및 정통 무용에 대한 이해도가 있는 사람을 MC로 섭외했더라면 어땠을까.
이준의 경우 올해 4월 "전지적 참견 시점"에 출연하여 15년 만에 무용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었고, 엔이 속해 있는 그룹 빅스의 경우 2017년 발매되었던 곡 ‘도원경 (桃源境)’이 국악 사운드, 부채, 한복 등 한국적인 요소의 적절한 활용으로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었고 말이다. 심지어 빅스는2018년 2월 132차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총회 개회식에 참석하여 ‘도원경’ 무대를 꾸미기도 했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여러 기사나 시청자 반응에서도 꾸준히 지적되고 있는 음악 선곡의 문제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미션 음원을 부른 아티스트는 죄가 없다. 그러나 발레, 한국 무용, 현대 무용이 주가 되어야 하는 이 프로그램에서 케이팝 스타일의 송폼, 랩, 가사는 오히려 무용수의 몸짓과 시청자의 상상력을 제한하고 있다. 특히 한국 무용의 경우 대중화를 고민했다면 차라리 유명 사극 음원을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도 싶다.
K-콘텐츠 미션을 위해 "오징어 게임", "기생충", "스카이캐슬", 그리고 "올드 보이" 이렇게 네 작품이 선정되었는데, 그 중 하나는 사극이었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다. 사극만큼 계급과 계층에 대한 서사가 가득 담겨 있는 콘텐츠가 또 있을까? "대장금", "선덕여왕", "해를 품은 달", "구르미 그린 달빛", "옷소매 붉은 끝동" 등 국내외 흥행에 성공했고 대중적으로 유명한 OST도 많이 갖추고 있는 사극 콘텐츠는 넘치도록 있다. 사극 음원이 하나 포함됐더라면 화제성, 한국적인 정서와 스토리 표현 등 여러 방면으로 활용해 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필요한 것은 낭만
시대상은 방송에 반영되고, 방송은 또 시대상에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프로듀스 101"과 스테이지 파이터 속 서바이벌의 방식은 개인이 시장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자신의 인적 자본을 극대화하게 만드는 신자유주의적 인간관에 기초하고 있다. 여기에서 인간은 존엄성의 주체이기보다는 일종의 투자의 대상이 된다.
이 프로그램의 취지가 정말로 뛰어난 무용수들을 국내외 대중에게 소개하는 것이라면, 그들을 존엄성의 주체이자 프로 직업인으로 대우해야 마땅하다. “발레는 잔인한 예술”이라고 말하는 박민우 무용수나 선천적인 오다리로 인해 턴아웃이 불가능하다며 오열했던 최규태 무용수의 모습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춤을 추는 존엄함이 있었다.
한국무용 첫 계급 결정전 당시 최호종 무용수는 자신의 창작 안무를 공개한 후 너무 어려워서 다른 무용수들이 따라할 수 있을지 우려가 된다는 평가에 “경쟁이라는 타이틀 하나로 작품의 질이나 퀄리티가 조절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라며 뼈 있는 일갈을 날렸다. 이는 다른 무용수들이 아니라 제작진이 들어야 할 말이라고 생각한다.
철저한 투자와 시장의 논리로 우리 자신을 끊임없이 평가하고 계발하는 성장 강박 속에 놓인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약간의 낭만이다.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아닌 조금은 무모하고, 조금은 고지식한 도전을 하는 사람들의 느슨한 연대가 함께 생존하는 이야기를 방송과 현실 모두에서 좀 더 자주 접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꿈꿔 본다. (끝)
작성일: 2024년 11월 10일
글쓴이 이소윤은 듀크 대학교 정치학 학사, 시카고 대학교 국제관계학 석사를 거쳐 현재 시카고 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다. 2015년부터 미국에서 유학하며 한류의 성장을 관찰해 왔고, 케이팝 산업 속 직업 교육과 일 경험에 대한 박사 논문 연구를 진행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