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흑백요리사"가 만난 "냉장고를 부탁해"... 시대가 원하는 비빔 인간, 경계를 넘어선 캐릭터의 힘

하나의 자아가 자신 내부의 것을 열심히 ‘비벼서’ 새로운 영역을 제대로 주장하는 시도는 도전 그 자체의 과정이 의미 있게 주목된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또한 에드워드 리가 품은 강력한 서사 덕분에 이 수순을 톡톡하게 밟았다. 시절은 흐르지만, 시대가 구(求)하는 캐릭터는 남는 세상에서, "흑백요리사" 이후에 생겨날 역사는 또 어떠한 캐릭터를 탄생시킬 것인가.

Bluedot Admin

이수지 | 디렉터스초이스 감독

"저는 비빔 인간입니다."
2024년 하반기를 들끓게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흑백요리사"에서, 단단한 입지의 우승 후보였던 에드워드 리 셰프는 자신의 인생을 담은 요리를 선보이며 이렇게 말했다. 참치회 비빔밥일지 주먹밥일지 모를 모호한 경계의 음식을 내놓으며, 미국에서 성장했으나 한국인의 피를 이어받은 그는 더듬더듬 차분한 어조로 자신의 정체성 역시 비벼진 음식처럼 모호했음을 설명했다. 이 한 마디는 프로그램의 대표 명언으로 회자되며 깊은 울림을 주고 있다.

비빔 인간이라니, 참으로 시적인 함축이면서도 순수한데 영리한 표현이지 않은가. ‘서로 다른 언어, 문화, 인종의 성질들이 뒤섞이다 보니 중립 지대의 외딴 존재가 되었다‘라는 뻔한 해석 외에도, 에드워드 리 셰프가 말하는 ‘비빔’에는 처연하고 악착같은 정서를 서툴게 표현하는 감성이 있다. 성장 과정에서 느껴왔을 혼란과 고뇌의 시간 하며, 뉴욕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던 때, 그의 부모가 소망했던 한인 사회에서의 엘리트 코스, 허나 그것에 반하는 셰프로서의 꿈까지. 이것들 모두가 ‘에드워드 리’이자 ‘이균’이라는 한 사람의 그릇 안에 비벼진 결과는, 요즘 세상이 말하는 ‘융합형 인재상’이 가진 저력을 제대로 보여준 결과와도 같았다.

에드워드 리 셰프의 인생을 담은 요리

우리는 그걸 ‘융합’이라 부르기로 했어요

2000년대 초반경부터 ‘융합'과 그의 친구들, 사촌과도 같은 용어들이 우리나라에 차츰 퍼져가기 시작했다. 융합, 통섭, 컨버전스, 융복합, 제너럴리스트 등과 같이 말이다.

어느 날 등장한 낯선 용어가 대세가 되면 그렇듯, 처음엔 그 말뜻의 활용을 조심스레 여기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용어의 언저리에 위치한 현상들이 허겁지겁 그것의 파워를 먹어치운다. ‘융합’이라는 용어 역시 마찬가지였다. 두 가지 이상의 이질적 요소가 하나로 어우러질 때마다 ‘융합’, ‘융복합’ 같은 용어들을 붙이고, 1+1=2를 넘어서는 시너지를 기대하는 남다른 비전을 손쉽게 설명할 수 있는 장치로 흔히 사용되곤 했다.

비빔밥을 여러 재료를 한데 모아 만든 조화의 측면에서 본다면, 김밥과 잡채 또한 유사한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세 가지 메뉴를 가장 보편적으로 알려진 방식으로 조리하는 과정을 살펴보자. 넣고 싶은 재료들을 길거나 가늘게 손질하여 각각의 물성에 적합하도록 소금 간이나 간장으로 다르게 양념하고 필요에 따라 어떤 것은 절이는 과정이 더해지기도 한다. 딱딱하고 무른 것에 차이를 두고 각 재료를 볶거나 삶는 등의 과정을 거쳐서 서로 다른 시간 동안 익혀낸다. 재료 하나하나의 특성을 고려한 다소 번거로운 밑 작업이 끝나면, 1차 가공된 재료들을 어떻게 합쳐내는가에 따라 비빔밥과 김밥, 잡채의 운명이 갈라진다.

김밥을 온 재료를 한데 모으고 밥의 끈기와 김이 머금은 수분으로 버텨지는 재료들의 모음이라 본다면, 잡채는 달큰 짭짤한 간장 양념 속에 잡다한 나물들(그리하여 ‘雜菜’이다)의 맛이 병렬적으로 존재하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비빔밥은 어떠한가? 비빔밥은 비비기 직전에 넣은 장의 맛을 필두로 온갖 재료들이 뒤섞여 그야말로 하나의 맛을 이루는 음식이라 볼 수 있다. 우리가 냉장고에 애매하게 남은 반찬을 해결할 참에, 각각의 반찬을 따로 먹지 않고 굳이 양푼 속에 밥과 함께 뒤섞어 고추장 한 숟갈, 참기름 쪼륵 둘러 슥슥 비비는 이유를 생각해보자. 비빔밥의 재료들은 무엇 하나 자신을 앞으로 내세우지 않고 서로가 만나 새로운 맛을 생성하는 것이 그 묘미이다.

비빔밥 한 그릇에 담긴 각 재료들의 시너지는 우리가 말하는 ‘융합’을 연상시킨다. 융합은 몇 가지 요소를 붙여서 서로 공존하는 형태가 아닌, 요소들의 화학적 결합을 중시하는 개념이다. 일반적인 융합 연구 과정은 예술과 공학, 인문과 과학 등과 같이 사물과 현상을 다르게 해석하는 분야들끼리 서로의 시야를 공유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부터 시작되는데, 이 과정이 지속되다 보면 우연한 계기에서 새로운 융합의 가능성을 발견하기도 한다. 필자의 경우, 한 모션 캡쳐 연구자가 코딩 실수로 생성한 실패 이미지를 보고 ‘자코메티’의 조각이 살아 움직이는 듯한 인상을 받은 경험이 있다.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실수였을 것이, 누군가에게는 신선한 영감으로 다가오는 이러한 예시는 다른 분야의 연구자들이 가진 경험과 지식이 적확한 시점에 마주쳐야 가능한 사건일 것이다.

보통의 사람이 아니고서야, 한 명의 인간이 두 가지 이상의 분야의 것을 두고 완연한 결합을 이루어 내는 것은 가히 쉬운 일이 아니다. 평생을 바쳐서 한 분야에서 정점을 이루는 것도 끝없는 싸움일 진데, 놀랍게도 이를 일찌감치 행한 예술가가 있다. 바로 모빌의 창시자, ‘알렉산더 칼더’가 그러하다.

경계를 넘어선 융합의 거장들

키네틱 아트의 선구자, 알렉산더 칼더는 스티븐스 공과대학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하고 예술가 집안에서 자라나 후에 뉴욕에서 미술을 공부했다. 몬드리안, 뒤샹 등 최고의 예술가들과 교류하며 자신만의 독특한 영역을 구축했다.

알렉산더 칼더의 작품 '플라밍고'

뒤샹은 조각이 움직일 수 있다는 의도에 호의적인 입장이었다. 뒤샹 자신 또한 돌아가는 자전거 바퀴를 작품으로 선보이며 조각의 감상 범위를 확장시키는 계기를 만들었고, 칼더의 움직이는 작품을 보고는 그것을 ‘모빌’이라고 명명한 역사가 있다. 칼더는 모빌 외에 금속으로 된 움직이지 않는 작품 또한 제작하였는데, 프랑스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장 아르프는 이것을 비꼬는 의미로 ‘스태빌’이라고 칭했다. 재미있게도 당시 칼더가 ‘스태빌’이라는 비판의 어조마저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면서, 그의 작품 세계는 모빌과 스태빌 두 가지 영역으로 일컬어지게 되었다는 일화가 존재한다.

칼더의 작품들은 대부분 금속, 나무, 도자기 조각 등 단단한 재질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작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들은 꽃, 물고기, 유칼립투스 같은 유기체적인 것들이다. 사물이 가진 단단한 질감에 ‘모빌’이라는 새로운 형식을 도입하여 공기의 흐름에 따라 잔잔히 흔들리는 움직임과 생명력을 불어넣는 그의 예술적 감각에는, 각 요소의 물성과 균형감을 철저하게 따져 놓은 공학도적인 계산이 내포되어 있다.

자신이 가진 내력과 학습된 지식을 멋진 한 덩어리로 구축해 낸 칼더의 시도는, 키네틱 아트의 거장으로 불리우는 테오 얀센의 활약으로도 이어진다. 테오 얀센은 네덜란드 델프트 공과대학교에서 물리학을 전공한 이과생 출신이다. 살랑이는 공기를 조용히 휘젓는 칼더의 작품이 ‘식물적 움직임’을 보여준다면, 거대하고 육중한 스케일을 자랑하는 테오 얀센의 작품은 대지를 성큼성큼 가로 짓는 ‘동물적 움직임’에 가깝다.

테오 얀센의 작품들. 바람이 불면 거대한 작품이 스스로 걸어가는 형식이다.

이처럼 하나의 자아가 자신 내부의 것을 열심히 ‘비벼서’ 새로운 영역을 제대로 주장하는 시도는 도전 그 자체의 과정이 의미 있게 주목된다. 넷플릭스 "흑백요리사" 또한 에드워드 리가 품은 강력한 서사 덕분에 이 수순을 톡톡하게 밟았다. 30분 간격으로 지옥 같이 이어지는 두부 미션 속, 에드워드 리 셰프는 기어코 닭고기로 우려낸 기름을 활용해 (닭고기는 결과물에서 제외한 채로) 자신의 주 배경인 켄터키 지방의 프라이드치킨을 연상시키는 두부 요리를 만들어 냈다. 다행히 그의 뚝심 그득한 의도는 그 가치를 알아보는 심사위원들에 의해 훌륭한 성적을 기록하고, 그 기세는 준우승인 결과에도 불구하고 ‘민심이 낳은 우승자’라는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데 기여했다.

"흑백요리사"의 최대 수혜자는 김풍 작가?

"흑백요리사"가 남긴 흔적은 매우 흥미롭게도, 유튜브 시장에서 미친 듯 노를 저은 JTBC "냉장고를 부탁해"로 이어졌다.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냉장고를 부탁해(이하 "냉부해")"는 과거 방영분 영상 내의 "흑백요리사" 출연진이 포함된 분량을 재편집하여 다시 업로드하는 형식으로 시작해 흑백요리사의 포인트를 쏠쏠히 따라가는 전략으로 급부상했다. "흑백요리사"에서 최현석 셰프가 자신의 시그니처 메뉴인 봉골레 파스타에 마늘을 빼먹는 실수를 저지르는 내용이 공개되면, 곧이어 "냉부해"에서 최현석 셰프가 저지른 실수 모음집이 재빠르게 업로드되는 방식이다.

재미있는 것은 "흑백요리사" 출연을 고사한 것으로 알려진 김풍 작가의 과거 활약상이 "냉부해"의 역주행 덕분에 재조명받고 있다는 사실이다. 당시 김풍 작가는 정식 셰프들이 잔뜩인 "냉부해"에서 정파에 대항하는 ‘사파 요리사’, 일명 ‘야매 요리’의 1인자 등으로 희화화되는 예능 캐릭터 역할을 충실하게 소화했던 이였다. 정작 "흑백요리사"에는 한 숟가락도 얹지 않았던 그의 존재감이 다시금 등판한 것은, 잘 만들어진 캐릭터와 시청자 간의 관계성이 얼마나 긴 수명을 이어갈 수 있는지를 시사하고 있다.

유튜브 시청자들은 "흑백요리사"의 시류를 타고 최근 폭격 수준으로 업로드되는 "냉장고를 부탁해" 영상들에 ‘노를 젓다 못해 모터를 돌리다가 우주까지 갈 참이다’라며 우스갯소리를 나누곤 한다. 그러나 이를 단순히 우스개로 치부할 게 아닌 것이, 실제로 JTBC는 "냉장고를 부탁해"를 연내 방영 목표로 하여 5년 만에 부활시킬 것을 발표하였다. 알렉산더 칼더가 물꼬를 트고 테오 얀센이 화려하게 수놓은 키네틱 아트처럼, 한쪽에서 터진 봇물이 콸콸 쏟아져 들어올 때 다른 쪽에서 놓치지 않고 노를 젓는 것은 새로운 영역 탐험과 확장의 시작점이 된다.

과거 쿡방이 누리던 전성시대를 기억하는가. 수많은 쿡방들이 시절 인연처럼 우리 곁을 스쳐 갔지만, 그때마다 우리에게 잔상처럼 남은 굵직한 캐릭터들은 여전히 그 향수 속에 잔류한다. 코로나의 위협을 통과한 현재의 우리 앞에 쿡방 시대의 조짐은 재도약을 꿈꿀 수 있을까. 이 흐름 속엔 한 명의 ‘비빔 인간’이 여태껏 해 온 요리가 아닌 새로운 한국 요리를 선보이겠다는 울림으로 쥐어 낸 지분이 존재한다. 쿡방의 시대가 새롭게 열릴 것이라면, 이전의 성공 문법과는 분명히 달라야 할 것이다. 시절은 흐르지만, 시대가 구(求)하는 캐릭터는 남는 세상에서, "흑백요리사" 이후에 생겨날 역사는 또 어떠한 캐릭터를 탄생시킬 것인지… 기대 한 덩이와 우려 한 스푼, 호기심 한 줌을 비빈 속내 한 그릇을 조심히 내어본다. (끝)

"냉부해"에서 정식 셰프들 사이 '야매 요리'를 담당했던 김풍 작가의 활약상이 재조명받고 있다.

작성일: 2024년 10월 23일

이수지 | 이화여대 학사, 카이스트 석사 졸업. 현재 한양대학교 문화콘텐츠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드라마, 영화를 연출하며 시청자 참여를 유도하는 영상 콘텐츠 기획을 연구하고 있다.